[이기홍 칼럼]이렇게 일방적으로 독주한 정권은 없었다

이기홍 논설실장 2019. 12.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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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세력 결집에만 골몰할 뿐.. 국가 미래와 공동체 분열은 안중에 없어
공수처 독립성·중립성 보장해도 설립 목적 달성에 아무 문제 없는데
뭐든 밀어붙여도 된다는 過信·욕심에 정권 하수인 조직으로 변질시켜
이기홍 논설실장
가정해 본다.

지금 대통령이 이명박 또는 박근혜인데, 여당이 범여권의 안정적 과반수를 보장하는 선거법 개정을 강행처리한 상황을….

이·박 대통령이 자신의 핵심 지지단체 출신들로 책임자와 검사를 뽑을 수 있으며, 검찰 경찰 등 다른 사정기관이 정권 핵심과 관련된 사안을 인지해 파헤치려 할 경우 이를 사전에 보고하도록 하고, 사안 자체를 다 이첩하라고 언제든 명령할 수 있는, 그런 막강한 대통령 보위기관 창설을 강행하는 상황을….

가정해본다. 청와대 실세들이 이·박 대통령과 친한 인사의 시장 당선을 위해 경쟁 후보 탈락 공작을 벌였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황을…. 대통령과의 인연을 등에 업고 경제부처 제왕 행세를 하던 고위공무원이 비리를 저지르다가 발각됐는데 청와대 실세들이 이를 덮어준 상황을….

짐작하건대 이·박 정권에서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면 수백 개 단체들이 범국민 투쟁본부를 조직해 연일 광화문광장을 메웠을 것이다.

또 상상해본다. 만약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다른 정권이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대통령의 최종 결정은 어땠을까. 장담하건대 아무리 고집 센 대통령이라도 더 이상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통치자는 민중 궐기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 ‘차우셰스쿠 공포’라 불러도 좋다. 그래서 여론이 강하게 반대하고 거리를 시위대가 메우면 움찔하며 멈춰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노조를 비롯한 확고한 좌파 조직기반을 갖고 있는 권력자는 조금 다르다. 문재인 정권은 지지층만 확실하게 결집시켜 놓으면 아무리 반대가 거세도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자신감은 보수층은 민중궐기 방식으로 조직화되기 어려우며, 만약 위기에 처하면 좌파정권에서 창출되는 숱한 이권을 누려온 좌파네트워크 종사자들이 나서서 맞불을 놓아줄 것이란 확신에서 나온다.

날치기 강행처리, 4+1 등등 온갖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면서도 ‘대의를 위해서는 절차나 과정의 하자는 불가피하다’는 운동권적 사고방식 덕분에 가책도 안 느낀다.

선명한 마이웨이가 총선, 대선에서 이기는 길이라는 확신 뒤에는 ‘가진 자 대(對) 덜 가진 자’의 대립 프레임이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다. 계층 간 대립이 심할수록 노동자·서민 표방 정당이 유리하다. 실제론 그런 정책이 덜 가진 자를 더 덜 갖게 만드는 부작용을 빚을 수 있다 해도 선거에선 유리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대립 프레임을 확산시키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아무리 실책을 거듭해도 40%가 훨씬 넘는 지지율이 나오는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정략적 계산을 한다면 그 순간 이미 국가를 이끌고 갈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지지세력만 바라보는 통치에는 국가는 염두에 없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세력을 거슬러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면서도 국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했다. 심지어 공포정치를 폈던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도 1985년 학원안정법을 강행하려다 반대가 거세지자 거둬들였다.

최고 권력자가 한발 물러서는 것은 공동체의 분열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다수로 밀어붙이는 것을 자제하는 이유는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뭐든 밀어붙이면 된다는 그릇된 자신감은 욕심을 키워 개혁을 변질시킨다. 괴물이 된 공수처법이 좋은 예다. 공수처는 장단점이 있는데 설립에 찬성한다면 이는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 견제와 권력층 부패 청산을 위해서다.

그런 목적에 충실한 공수처를 만들면 되는데, 공수처를 대통령의 홍위병 조직처럼 변질시킬 수 있는 내용들을 굳이 고집한다. 공수처장 인선에서 대통령의 영향력을 철저히 배제하고, 인적 구성과 활동의 중립성 독립성을 보장해도 공수처 설립 목적 달성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텐데, 정권의 충견처럼 사용하겠다는 욕심이 발동해 개혁의 본뜻 자체를 훼손시켰다.

모든 걸 마음대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과신하는 대표적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런 트럼프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인 것은 그에겐 참으로 행운이다. 만약 그처럼 충동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이 견제 시스템이 부실한 절대권력 국가의 통치자였다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백악관의 노골적인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줄줄이 탄핵 청문회의 증언대에 서서 대통령을 고발하는 공직자들이 있기에 트럼프의 독주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은 채 자제되고, 결과적으로 정권의 ‘폭망’이 예방되는 것이다.

문 대통령도 조국 일가의 문제와 청와대 실세들을 파헤치는 검찰과 언론의 역할에 훗날 감사해야 할 것이다. 현재 드러난 정권 실세들의 행태가 만약 아무런 브레이크 없이 정권 후반기까지 이어졌다면, 줄줄이 감옥으로 갈 대형 비리와 적폐들을 무수히 빚었을 것이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폭주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정권이 비극을 맞을 수 있다고 검찰과 언론이 경고음을 울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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