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너무나 먼 '크리스마스 평화'

최은영 2019. 12. 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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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제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프랑스 북부 독일군 점령지역에선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독일, 프랑스, 영국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왔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영국군은 갑자기 백파이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독일군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이들이, 상대를 향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 것이다.

이로서 크리스마스 단 하루를 위한 휴전 협정이 맺어진다. 이는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의 2007년도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의 줄거리다. ‘크리스마스는 평화’라는 의미를 극적으로 살린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 있었던 ‘크리스마스 휴전’을 모델로 한 것이다.

바로 얼마 전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왔었다. 하지만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휴전은커녕 대립으로 얼룩졌다. 북한은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대놓고 미국을 위협하고 있고, 국내 정치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살벌한 전쟁터에서도 평화를 만들었던 크리스마스가 우리나라 정치판에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우리나라 정치판에 신기한 현상이 발생했다. 그 신기한 현상이란, 선거법 개정 저지를 위해 야당이 시작한 필리버스터에 여당 의원들과 이른바 범여권 의원들도 ‘동참’한 것을 말한다.

그것이 신기한 이유는 이렇다. 필리버스터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의회 안에서 합법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의사 진행을 고의로 저지하는 행위’로 정의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버스터는 일반적으로 소수 야당이 자신들이 반대하는 법안의 통과를 저지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대 여권(여당+범여권)’이 자신들의 선거법 개정 논지를 설명하겠다며 ‘유사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과연 한국당이 ‘소수 야당’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여권의 ‘맞불 필리버스터’가 불법인가 하는 문제다.

우선 첫 번째 의문점부터 생각해보자. 얼핏 한국당의 의석수를 생각해 보면, 소수 야당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걸맞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당은 소수 야당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우리는 여성 인권을 말할 때 소수 인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수적으로 보면 여성이 지구 인구의 절반인데, 왜 소수 인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여성 인권을 소수 인권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단순한 숫자 때문이 아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와 남성 기득권으로 점철된 권력 구조를 중심으로 바라보면, 여성의 인권은 소수 인권이라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권리라는 측면은 단순히 숫자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야당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차원에서 ‘소수 야당’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의문점을 생각해보자. 여당과 범여권 의원들이 이른바 ‘맞불 필리버스터’를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볼 수 없다. 의원이면 누구나 필리버스터에 동참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여당이나 범여권 정당들은 분명 선거법 개정안을 하루빨리 통과시키고 싶을 텐데 의사진행을 저지하는 행위인 필리버스터에 동참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문제는 제도의 취지를 살려야 할 여당이 필리버스터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데 있다. 즉 소수 야당들의 자기표현 수단이자 자신들의 의지 관철 수단인 필리버스터에 여당이 동참하면 제도를 무력화 시킨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을 가진 집단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여권은 ‘맞불 필리버스터’를 할 것이 아니라,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북한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모으는 일을 해야 한다. 내부 갈등은 외부 도전에 대한 대응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의 평화는 앞으로도 비켜갈 듯싶다. 정말 안타깝다.

최은영 (eun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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