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진정서 받았던 지검장님이 사기 피고인 변호인이라뇨?"

문예슬 2019. 12. 2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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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액 56억 '인트비트 사기 사건'

김 씨는 오늘도 그날을 후회합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함께 더 큰 집으로 옮기기 위해 틈틈이 모은 천만 원을 가상화폐 거래소에 입금한 날입니다. 거래소 대표는 "한 번 더 검증을 거쳤기에 안전하고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고 확신시켜줬습니다. "저희 소속 변호사는 (가상화폐와)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부장검사 출신"이라는 말에, 안전한 투자처라고 믿었습니다.

월급을 쪼개 모은 돈이 그렇게 순식간에 날아갔습니다. 어느 순간 출금이 막혔습니다. 전국에서 피해 신고가 빗발쳤고, 서버가 소재한 곳인 안동에서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대표는 경찰이 세 번 구속영장을 신청한 끝에 구속됐습니다. 신고된 피해자만 191명, 확인된 피해액만 56억이 넘는 '인트비트 사기 사건'입니다. 지금도 추가 피해 사례가 접수되고 있는데, 지난해 전국을 흔들다시피했던 '돈스코이호 사기사건' 피해액 90억 원에 버금갑니다.

김 씨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요? 10년간 야간 생산직에서 일하며 커피숍을 차리기 위해 모은 1억을 날린 사람, 돈을 잃었다는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연관기사] [끈질긴K] “지검장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퇴임 두 달 만에 피고인 변호


사기 피고인 변호인으로 나타난 '지검장 님'

이 사건은 안동지청의 지휘로 안동경찰서가 수사했습니다. 피해자들도 답답한 마음에 대구지검장 앞으로 진정서를 세 차례 보냈습니다. 조금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수사 착수 석 달 만인 7월 초, 안동지청은 전·현직 대표를 구속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안도했던 마음도 잠시, 인터넷에서 재판 진행 상황을 매일 확인하던 피해자들은 믿기지 않는 이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박윤해'. 피해자들이 여러 차례 호소하고 읍소했던 대구지검장의 이름이었습니다. 인트비트의 전직 대표이자 주요 피고인인 신 모 씨의 변호인의 이름이었습니다. 동명이인이겠거니 했지만, 소속 법무법인의 이름을 검색해 본 결과 박윤해 전 지검장이 맞았습니다.

처음 이 같은 내용으로 제보가 들어왔을 때 KBS 취재진도 '설마' 했습니다. 전관 변호사는 자주 제기되는 이슈이고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우려하는 것에 비해 실제 전관 변호사의 효과는 미미하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우는 너무 노골적이고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호사법상 문제없습니다"

박 전 지검장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여러 차례 만남을 요청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박 전 지검장이 개업한 법무법인의 소속 변호사가 대신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변호사법상 안동지청과 대구지검은 별개의 국가기관으로 보고 있어서 수임 제한에 위반되지 않고, 대한변협에 문의해 봤을 때도 괜찮다고 해서 진행된 건"이라는 답변입니다.

실제로 지청과 지검은 비교적 독립적인 관계입니다. 지청의 사건은 지청에서 처리할 뿐, 지검의 결재나 지휘를 받지 않습니다. 현행 변호사법은 검사가 퇴직하면 1년 동안 재직 중에 처리한 업무를 수임할 수 없도록 하고 있는데, 지검 산하 지청 사건의 경우 지검장이 결재선에 있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수임 제한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트비트' 사건처럼 규모가 크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의 경우 구속영장 청구 등 중요한 지점마다 지검에 보고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지검장이 일일이 지휘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수사 내용은 보고가 된 겁니다. 박 전 지검장도 "사전에 사건 처리에 관여하지는 않았다"라면서도 "통상 사건처럼 정보 보고는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또 박 전 지검장이 사건을 수임한 이후 안동지청에 한 차례 방문한 것도 확인됐습니다. 박 전 지검장은 이에 대해 "기소 이후인 피고인에 대한 1심 재판을 선임한 것이고, 최근 지청 방문은 피고인이 추가로 기소되는 것이 있어서 간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갈렸습니다. 자문을 구한 한 KBS 자문변호사는 "요즘은 옛날 같이 검찰이 '한 식구'라는 관념이 없어지고 있다"며, 지청 평검사가 전직 지검장의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또, 피의자·피고인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전관 변호사를 선임한다고 해도, 실제로 변호인이 사건을 수행할 때는 그런 기대와 별개로 사건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민변 소속의 또 다른 변호사도 지청 단위 사건까지 수임하지 못 하는 것은 과하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반면 검사장의 수임 제한을 산하 지청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김제완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사장이 산하 지청장에 대해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지휘·감독 관계도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검찰청법 22조는 "지청장은 지방검찰청 검사장의 명을 받아 소관 사무를 처리한다"고 규정합니다.

김제완 교수는 또, "검사로서 자기가 지휘하는 사건이나 근무 중 알게 된 수사상 내용과 노하우는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돼야 하지, 퇴직한 뒤 개인적인 사건 수임을 위해 활용되는 건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이는 매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고위직 법조인들은 수십 년 동안 재직하며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고 명예와 존경을 받아 왔다"며, "퇴직 후에도 연금을 받고 산하 기관장으로 가는 등 혜택이 있는데도, 고액의 비용을 받고 변호사 활동을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기 피해액이 어떻게 전관 변호사 비용으로 들어가나요?"

피해자들은 "사기 편취로 번 돈이 어떻게 전관 변호사들에게 들어갈 수가 있는 건지, 정말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화가 난다"라고 한탄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지검장 님'에게 묻고 싶었던 건 법이나 규정이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과 법조인의 양심이었습니다.

문예슬 기자 (moonst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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