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없는 현강 자료".. 조바심으로 먹고 사는 대치동

조아름 2020. 1. 3.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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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의 탄생, 대치동 리포트] <2>불안을 먹고 사는 학원가

매번 바뀌는 대입 제도에 혼돈“A부터 Z까지, 믿을 건 학원뿐”

새해를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근처 한 카페에서 수험생으로 보이는 한 학생이 문제집을 풀고 있다. 배우한 기자

“우리 애 대학 원서 접수할 시간까지 정해서 알려주더라고요.”

지난해 큰 딸(21)이 서울의 한 상위권 A대학 디자인학부에 입학했다는 학부모 윤혜정(가명ㆍ49)씨.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윤씨는 아이가 고 2가 돼서야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바꾼 탓에 급하게 미대 입시학원을 수소문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윤씨가 선택한 학원은 윤씨 딸을 비롯해 A대학에 지원하는 수강생 50여명에게 원서접수 시간을 일일이 정해줬다. 접수 시간대가 비슷하면 실기시험 순서도 비슷해질 가능성이 높고, 같은 학원에 다녀 그림 분위기나 패턴 등이 유사해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게 학원 측 설명이었다. 윤씨는 “합격에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지만 학원이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니 안심이 된 게 사실”이라며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주는 건 대치동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먹이 삼아

사교육 업계에선 ‘대치동은 부모들의 불안을 먹고 산다’는 말이 오간다. 대치동에 가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명문대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부모들의 불안감은 지난 20여 년간 대치동을 사교육 시장의 메카, 나아가 ‘학벌의 산실’로 자리 잡게 한 동력이었다. ‘대치동에만 있는 강사, 대치동에서만 주는 강의 자료, 대치동에서만 알려주는 대입 정보’란 학원 측 설명이 학부모들로 하여금 과감한 투자를 하게끔 만든다는 게 사교육 업계 안팎의 목소리다.

대치동에서 20년 간 운영돼 온 입시학원에서 현재 고등부 전체 운영을 맡고 있는 박모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강의 자료를 나눠줄 때 ‘이 자료들은 절대 밖에서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같은 학교 친구의 학원자료가 궁금한 데 빌려주지 않는다? 그걸 알게 된 부모는 혹시 그 강의 자료에서 수능 예상문제가 나오는 건 아닐까 초조해집니다. 학원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죠.”

2000년대 초반부터 대치동 수업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들을 수 있는 인터넷 강의가 확대돼 왔음에도 대치동에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불안감이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대치동 학원들은 소위 ‘현강’(현장 강의)에서만 제공하는 강의자료가 따로 있다. 주로 강사들이 직접 만든 문제 모음집과 해설 자료들이다. 대부분의 학원이 저작권 침해 등의 문제를 이유로 인터넷상에 게재하지 않는 이 현강 자료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학원에 몰린다. 특히 새 학기나 방학이 시작될 무렵 이른바 ‘1타강사(1등 스타강사의 줄임말)’로 불리는 유명 강사들을 보유한 대치동 학원들에선 학생들이 수강 등록을 하기 위해 밤새워 줄을 서는 모습까지 흔하게 볼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대치동에서 재수학원에 다닌 정영진(20)씨는 “강사들이 현강할 때 수능 대비 자료를 더 많이 챙겨 준다”며 “그걸 아는 학생들로선 좋은 자료를 받아 가야겠다는 생각에 학원에 직접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학생 강희주(20)씨는 “스타강사들은 주로 자신의 강의를 듣고 명문대에 간 강의 조교들을 20~30명씩 거느리고 자료 만드는 데도 이들을 투입한다”며 “현강을 들으면 이 조교들이 틈틈이 입시 상담도 해준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먼저 간 선배들을 바로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대치동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원하는 성적을 얻으려면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도 뒤늦게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정씨는 대치동 현강이 반드시 성적 상승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그는 대치동 학원을 “콩깍지에 가깝다”며 “겉에선 보기엔 대단해 보이지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입시에서) 망한다는 점에서 다른 학원에 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털어놨다.

[저작권 한국일보]사교육비 총 규모 증가 추이/ 강준구 기자/2020-01-02(한국일보)

◇뛰는 입시정책 비웃는 대치동

사실 대치동의 ‘불안 마케팅’이 효과를 거두는 데엔 변화를 거듭해 온 대입정책 탓이 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널뛰듯 오락가락한 대입정책이 학부모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이를 간파한 학원들이 변화하는 입시 정책에 발 빠르게 적응하면서 이들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대치동에서 유명 논술 강사로 활동 중인 A씨는 “정부가 최근 정시 확대를 발표한 뒤 학원 상담실장들의 영업 멘트가 ‘어머니, 이번에 정시 확대된 거 아시죠’로 시작됐다”며 “기존에 내신 위주로 운영하던 수업도 ‘수능 모의고사와 함께 대비해주겠다’는 식으로 전략을 바꿨다”고 귀띔했다. “대입정책이 어디로 뛰든 그 위를 날아다니는 곳이 대치동”이라는 게 A씨 설명이다.

바뀐 대입정책에 따라 대입전략을 새로 짜야 하는 학생, 학부모들로선 ‘믿을 건 학원뿐’이란 인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특히 대치동의 경우 어느 지역보다 다양한 종류의 학원이 모여 있어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선 ‘A부터 Z까지 다 있는 곳’으로 통한다. 대치동에 거주하며 고1 아들(17)을 키우는 학부모 이은아(가명·45)씨는 “내가 모든 대입전형을 꿰뚫고 있지 않는 이상, 우리 아이가 어떤 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 있는지 학원이 알아서 전략을 짜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또 다른 고1 학부모 역시 “체대나 미대입시, 특기자 전형 같은 ‘틈새시장’을 노리는 학생들을 위한 학원들도 어차피 대치동에 다 있다”며 “검증된 백화점이나 다름없는데 이 곳을 떠나는 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홍섭근 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교육에 투자해서 이른바 스카이(SKY) 대학을 가는 학생들은 실제로 사교육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르는 0.01%에 불과하다”며 “(학원들은)아주 소수의 학생들 사례를 일반화한 뒤 불안감을 자극해 홍보효과를 누리는 것 뿐”이라고 지적했다.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mailto:archo1206@hankookilbo.com)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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