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간다던 왕건함, 미국·이란 사이서 갈길 잃었다

이근평 2020. 1. 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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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이란 군부 실세 거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정예부대(쿠드스군) 사령관 공습으로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일촉즉발로 치달으면서 호르무즈 파병을 둘러싼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한국 선박 보호 등을 들어 파병에 무게를 두던 정부의 기존 셈법이 이란과 전쟁 가능성이라는 돌발 변수에 다시 혼란에 빠졌다.

정부 관계자는 5일 “파병과 관련 아직 정해진 건 없다”며 “정세가 좋을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중동 상황을 살핀 뒤 시기를 길게 잡고 국익 계산기를 두드려보겠다는 의미다.

지난해 12월 27일 부산작전기지에서 청해부대 31진 왕건함이 출항하고 있다. [사진 해군 작전사령부]

당초 정부는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에서 호르무즈 파병 방침에 뜻을 모은 바 있다. 내년 1월 바레인에 사령부를 둔 국제해양안보구상(IMSC)에 연락 장교 1명을 보내 준비 작업을 하고, 2월에는 아덴만 해역에 있는 해군 함정을 호르무즈로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이 방안대로라면 2월 초 강감찬함과 임무를 교대하는 청해부대 31진 왕건함(4400t급)이 호르무즈 해협으로 향하게 된다. 이미 왕건함 부대원들에겐 작전 지역이 임무 중 변경될 수 있다는 공지가 내부적으로 하달됐다고 한다. 국방부는 법률 검토 결과 새 부대의 파병이 아닌 기존 부대의 작전 지역 변경은 국회 동의를 받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미국과 이란 간의 전면전 가능성까지 점쳐지면서 이 같은 방침에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미국의 파병 요청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파병) 명분은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한국 상선 보호가 우선이었다”며 “선택지에 없던 전면 참전 가능성까지 감안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과 이란이 전면전을 벌일 때 청해부대 파병이 이뤄진다면 한국 함정과 선박이 이란군의 타깃이 돼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군 당국자는 “미국 연합체에 참여하면 그때부턴 청해부대가 방어 개념의 군대가 아니라 공격 의도를 갖는 군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며 “이란이 한국 선박을 목표물로 삼아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70%와 가스의 3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 유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은 여전히 살아있다. 한ㆍ일 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연장 등을 놓고 한·미 관계가 파열음을 낸 상황에서 미국의 요청을 또다시 외면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정부는 미국 주도의 IMSC에 파병하지 않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독자 파병하는 방안을 선택지에 올려놓고 있다. 미국 요청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연합체엔 참가하지 않아 이란과의 마찰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에겐 미국도 중요하고, 이란도 중요하다”며 “주어진 상황에 따라 최대한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이근평·이유정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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