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울' 힘겹게 성공했지만.. 살아남기 '또다른 전쟁' [심층기획 - '서울공화국'의 젊은 이민자들]

- 2020. 1. 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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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구 5명 중 1명은 청년 유입자 / 인프라 갖췄지만 상대적 압박감 높아 / 지방 정 많고 서울 합리적.. 정서 달라 / 둘 사이 어정쩡한 지점서 경계인 신세 / 일상 역동적 흐름에 에너지 소모 커 / 내외적 끊임없는 자기계발 내몰려 / 종일 시달리다 귀가 땐 방전된 느낌 / 고단한 삶에 우울감·불안 호소 일쑤
“지금 서울을 떠난다면요? 음, 저 스스로 의심이 생길 것 같아요. 내가 못 버틴 건 아닌가, 경쟁에서 도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서울 성북구에 사는 김미경(31·여·가명)씨에게 ‘탈서울’은 언젠가 이루고 싶은 희망인 동시에 불안감이기도 하다. 높은 주거비와 치열한 경쟁을 감당해야 하는 ‘서울살이’는 마치 외다리로 버티는 삶처럼 위태롭고 공허하지만, 그래도 놓치기는 싫은 ‘열매’와도 같다는 뜻이다.

경남의 한 소도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김씨는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토록 원했던 ‘인(in)서울’ 코스를 무난히 통과하고, 졸업 후에는 무사히 ‘대기업 정직원’이란 타이틀까지 거머쥐었지만 김씨의 서울살이는 여전히 힘겹기만 하다. “학창시절에는 자취방이 내 집같이 느껴지지 않아 외로웠어요. 지금도 월세와 공과금 모두 내가 벌어서 내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로 ‘임시거처’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요.”

김씨는 성북구에 있는 보증금 3000만원, 월세 50만원의 원룸에 거주 중이다. 김씨는 “(입사) 동기들과 월급은 같아도 월세와 관리비를 합치면 실질소득은 훨씬 낮은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다른 사람들이 월급을 모아 목돈을 만들 때,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김씨는 서울 생활을 당장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서울과 지방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가 존재한다고 했다. “서울은 빠르게 변하는 곳이고, 사람들은 계산적이죠. 하지만 합리적이기도 해요. 지방은 정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도 종종 벌어져요. 가끔 각박한 서울의 정서가 실망스러워 고향에 내려가면, 그동안 잊고 있던 지방 특유의 불합리한 모습들이 다시 보여요. 그럴 때마다 제가 바로 그 ‘서울사람’이 돼 버린 느낌을 받는다니까요.”
비교적 선진적인 의식 수준과 훌륭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정서적 안식을 주지 못하는 서울.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어 마음만은 따뜻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삶의 질서를 이탈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큰 지방. 이 둘 사이의 어정쩡한 지점에 김씨는 위태롭게 서 있다.

올해로 11년째 서울을 ‘살아내고’ 있는 김씨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전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게 아니고 ‘서울’에 사는 거예요. 말만 같은 나라일 뿐, 지방을 떠나 서울이란 전혀 다른 나라에 살아보려고 온 ‘이민자’ 같다는 생각을 해요.”

5일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김씨와 같이 스스로를 ‘서울 이민자’라고 여기는 청년(20∼34세)은 2017년 기준 230만3900여명이다. 서울 인구의 5명 중 1명을 이들 젊은 이민자가 채우고 있는 셈이다.
◆쉬지 않는 도시, 소모되는 청년

세계적인 여행 안내 책자인 ‘론리플래닛’은 서울을 ‘24시간 멈추지 않는 도시’라고 표현한다. 원하는 게 있다면 서울은 낮이든 밤이든 모든 걸 제공할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여서다. 산업과 인프라가 집약된 서울은 그만큼 다른 국내 다른 도시와 견줘 바쁠 수밖에 없다. 실제 한국인의 평균 근로시간(2017년 기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연평균 노동시간(1746시간)을 훨씬 웃도는 2024시간으로 나타났다.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일하고 급격한 성장을 이룬 덕분에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역동적이지만, 그만큼 구성원의 에너지 소진도 상당하다. 이런 서울을 두고 청년들은 ‘경쟁에 최적화한 도시’라고 입을 모은다. 묘하게 비트는 듯한 어감의 표현이다.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건우(31·가명)씨는 “(서울에서는) 끊임없는 자기발전이 없으면 나태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며 “자기 계발과 성장에 대한 압박을 내외부에서 많이 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입시 경쟁에 이어 취업 경쟁까지, 그럭저럭 치열한 경쟁에 익숙해진 청년들조차도 고달픈 서울살이를 대체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한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이젠 지쳤다’고 호소한다. 말 그대로 있는 힘 없는 힘 다 쏟아부어 더 이상 쓸 기운이 없는 ‘번아웃(burnout)’ 상태다.
박수진(31·여)씨는 2년 전 이른바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회사를 박차고 나갔다. 끝이 안 보이는 격무를 견디기 힘들었던 탓이다.
“오전 8시까지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으면 퇴근하는 밤 11시까지 거의 꼼짝도 못 하고 일만 해요. 그래도 계속 일이 쌓이고, 다른 잡무까지 처리하다 보면 주말에도 출근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과 생활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만은 보장될 거라고 기대하며 옮긴 스타트업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 직장에 들어간 박씨는 지난해 여름 딱 하루 휴가를 쓴 뒤 연말까지 쉬지 못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방전된 배터리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울한 청년의 나라, 대한민국

고단한 삶에 지친 청년들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국내에 발표된 한 연구는 우리나라 청년을 지배하는 중심 정서를 ‘우울’로 규정했다.

지난해 ‘한국사회학’에 실린 구혜란 서울대 연구교수와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구서정씨가 공동으로 분석한 논문 ‘우울한 청년, 불안한 장년의 나라’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세대(19∼36세)에 대해 “물질적 풍요와 교육적 혜택을 받았지만, 역량에 비해 취업문이 좁고 성취를 누리기 어려운 세대”라고 진단했다. 이어 “청년의 마음 가장 중심에 있는 정서는 우울”이라고 강조했다.

구 교수 연구팀이 베이지안 네트워크 분석을 이용해 정신건강 구성 요소를 살펴본 결과 청년들의 이런 우울감은 불안과 함께 찾아오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울러 ‘힘듦’이란 키워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 교수는 “내적 만족보다 외적 성공을 좇는 생활을 지속할수록 청년의 삶이 힘들어지고, 우울감을 높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soon@segye.com

베이지안 네트워크 분석이란?=18세기 영국의 장로교 목사였던 토머스 베이즈가 만든 통계 기법. 객관적으로 발생한 빈도를 중시하는 전통적 통계와 달리 연구자 개인의 ‘주관’을 비중 있게 고려한다. 통계 작업에 임하는 연구자의 주관적 신념 체계를 ‘사전분포’란 이름 아래 분석의 전제로 수용한다. 이 사전분포를 밑바탕으로 삼아 거기에 새로 취득한 정보를 계속 더해가는 특성 때문에 요즘 인공지능(AI) 기술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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