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세계일보

[배연국칼럼] 주인 자격이 있는가

배연국 입력 2020.01.06.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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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1984년'과 2020년 한국 / 진실과 거짓이 뒤바뀐 현상 흡사 / 나라에 불의와 반칙 춤춘다면 / 국민이 선거에서 심판 내려야

여하튼 이 나라에선 모든 것이 가짜다. 진실은 거짓의 동의어이고, 평화는 전쟁을 가리킨다. 풍요는 빈곤이고, 사랑은 증오이며, 자유는 예속을 의미한다.

가치전도의 이 나라 오세아니아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진리부(眞理部)의 서기로 일한다. 그의 소임은 과거 기록을 고쳐 쓰는 일이다. 최고 권력자 빅 브라더의 예전 발언이 실제와 어긋나면 그 말을 고쳐 일치시키는 식이다. 모든 기록과 거짓을 진실로 바꾸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없애버리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진실 아닌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권력자가 ‘2+2=5’라고 하면 그게 진실이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쓴 ‘1984년’에 나오는 섬뜩한 이야기다.
배연국 논설위원
요즘 문재인정부 행태에서 오웰 소설의 데자뷔를 느낀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현상이 너무 흡사한 까닭이다. 불의가 정의로 행세하고, 반칙은 공정으로 위장하고, 분열이 포용의 춤을 추는 일이 허다하다. 역사적 사실마저 권력의 구미에 맞게 조미된다. 의혹만으로 장관 지명을 철회할 수 없다던 권력자는 의혹만으로 탈북 어민들을 사지로 강제 북송한다. 그의 청와대 대변인은 열두 가지 잘못을 범한 중죄인을 착한 양으로 분칠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검찰 개혁의 출발선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라고 썼다. “이 목표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활용하려는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라면서 윤석열 검찰을 향해서는 정치권력의 이빨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검찰에 ‘산 권력’도 수사하라고 해놓고는 막상 수사의 칼날이 청와대로 향하자 갖은 수단으로 검찰을 해찰한다. 마치 검찰 개혁이라 쓰고 검찰 장악으로 읽는 격이다.

이런 비정상이 지속되는 이유는 선동에 취약한 대중이 이미지 조작에 쉽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대중은 자기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만약 어떤 정보에 의심이 들어 진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별도의 시간적, 경제적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팩트를 모으고 검증하는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다. 생업에 바쁜 보통사람들은 그럴 여유가 없다. 권력자들은 그 빈틈을 노려 대중을 속이고 선동한다.

명심할 점은 어떤 악마도 악의 이름으로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천사의 이름을 빌려 악을 행한다. 공정의 이름으로 반칙을 범하고 정의를 빙자해 불의를 저지른다.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독재자가 바로 히틀러였다. 그는 ‘국민적’, ‘국민의’라는 표현을 입버릇처럼 썼다. 총통이 되자 자신의 정부를 ‘국민의 정부’로 부르며 ‘국민적 고양’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의 군대는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글귀가 새겨진 허리띠 버클을 차고 사람들을 도륙했다. 이웃나라를 짓밟은 일제가 내세운 명분 역시 아시아의 공존공영이었다.

2020년 대한민국이 암흑의 ‘1984년’으로 회귀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오웰의 나라에 없는 ‘주권’이라는 보배가 있다. 문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으로서 헌법적 권한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끄는 동력은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이 아니다. 우리 헌법 1조가 천명한 주권자의 힘이다. 주권의 원천은 국민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권력자는 국민의 위임을 받아 잠시 나라를 다스리는 대리자일 뿐이다. 그런 만큼 대리자의 잘못을 제어하고 징치할 책임은 당연히 주인에게 있다.

지금 권력층에 난무하는 거짓은 누구 책임인가? 나라에 활개치는 반칙과 불의는 누구 잘못인가? 그 궁극의 책임은 모두 국민에게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했다. 우리가 정직하지 못한 정부를 가졌다면 그 책임 역시 국민에게 있다.

4월 총선은 딱 99일 남았다. 그날은 국민이 각자 주인의 자격을 묻는 ‘주권자격시험일’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과연 주인 자격이 있는가?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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