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간 자궁근종 안고 산 50대, 거즈 여러장 뒤엉켜 있었다

백경서 2020. 1. 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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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제왕절개로 출산한 50대 여성
2017년 자궁 속에서 13cm 거즈 발견
자궁 적출 후 평생 호르몬제 먹어야
[연합뉴스]
50대 여성이 의료진의 실수로 24년간 자궁 속에 거즈를 넣은 채 살아오다 자궁 적출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피해 여성의 아들은 지난 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의료사고 후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제대로 된 치료비를 받지 못했다"며 "의료사고 피해자를 위한 현실적인 판결과 소송 절차를 마련해달라"는 글을 올렸다.

청원글에 따르면 여성 A씨(54)는 1993년 울산 남구의 한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했다. 이후 A씨는 해당 병원에서 난소와 자궁에 근종이 있다는 검진 결과를 받으며 "근종이 커지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따라 그동안 A씨는 근종이 커지거나 암으로 변할까 봐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았다. 다만 그는 "근종 때문인지 자주 방광염도 걸리고, 해당 부위가 저린 느낌을 자주 받았다"고 했다.

청원글에 따르면 A씨는 24년이 지난 뒤에야 지금까지 자신이 '근종'인 줄 알았던 것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 한다. 2017년 6월 A씨는 건물 옥상에서 환경미화 작업을 하던 중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가슴과 배 쪽을 화단 난간에 부딪힌 A씨는 오른쪽 갈비뼈 3개 골절과 하복부 출혈로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그런데 A씨를 수술하기 위해 복부를 개복한 의료진은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했다. 수술실에서 사용하는 여러 장의 거즈가 A씨의 방광과 자궁 쪽에 유착돼 알 수 없는 형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의료진은 다수의 거즈가 몸에 유착돼 가로 13㎝, 세로 13㎝ 크기의 '종괴'를 형성했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자궁이 손상됐고, A씨는 결국 자궁 적출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 후 A씨는 평생 호르몬 대체요법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A씨 가족은 24년 전 제왕절개수술을 한 병원에 항의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병원으로부터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청원 글에서 글쓴이는 "저희는 병원 측의 진심 어린 사과만 있었다면, 원만하게 합의하려고 했다"며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병원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소송밖에 없었다"고 했다.

[중앙포토]
그렇다면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지난해 11월 열린 1심에서 울산지법은 병원 측이 자궁 적출 수술비와 위자료 2200여 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제왕절개수술 당시 의료진의 잘못으로 인해 A씨 몸에 거즈가 남았다는 점은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A씨가) 제왕절개수술을 가장 마지막에 받았고, 이 수술의 경우 거즈를 제거하지 않은 경우가 자주 발견되는 점 등을 봤을 때 제왕절개수술을 한 병원이 의료상 과실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

다만 재판부는 호르몬 대체요법 등 A씨가 받아야 할 앞으로의 치료비에 대해선 병원 측의 손해 배상 의무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호르몬 대체요법은 양측 난소 수술을 하지 않은 만 52세(A씨의 수술 당시 나이)의 일반적인 폐경 후 여성에서도 시행될 수 있는 처치"라며 "병원 측의 과실로 인한 손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A씨의 가족들은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며 항소했다. 청원 글에서 글쓴이는 "이는 여성을 인간으로 바라보기 전에, 출산을 위한 도구로 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판결"이라며 "자궁 적출 당시 어머니는 폐경기가 아니었던 점, 만 52세의 일반적인 폐경 여성이 모두 호르몬 대체요법을 시행하는 것은 아닌 점, 어쩔 수 없이 평생을 호르몬제를 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점을 고려해 달라"고 호소했다.

또 글쓴이는 10년의 공소시효가 지나 병원에 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점도 지적했다. 글쓴이는 "93년에 수술이 시행됐는데 어떻게 몸속에 거즈가 있을 줄 알고 10년 내로 형사상 책임을 묻느냐"며 "이런 경우라면 거즈 발견 시점을 시효 기산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서 "국가에서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위해 현실적인 피해 보상 기준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해당 병원 측은 "당시 의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병원에서 수술용 거즈를 근종이라고 오진했는지 여부 등은 알 수 없다. 항소심이 진행 중으로 더는 할말이 없다"고 밝혔다.

울산=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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