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도 없는 청소노동자 휴게실 "악취 맡을 수밖에.."

정경훈 기자 2020. 1. 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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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수거된 노동자]①서울 경찰서 31곳 중 12곳 분리수거 노동자 휴게실 가이드라인 어겨..없거나 분리수거물 옆에서 쉬기도

[편집자주] 어느 기관이나 회사가 겉보기에 '멀쩡'히 운영되는 과정에는 안 보이는 곳에서 궂은 일을 맡은 분들의 꾸준한 노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같은 '숨은 노동'을 제공하는 분들일수록 처우역시 가려지는 일이 허다한데요. 머니투데이 사건팀은 가까운 곳부터 '숨은 노동자'의 공간을 점검해보려 합니다.

서울종로경찰서 분리수거장. 분리수거 청소노동자를 위한 별도의 휴게실이 마련돼 있지 않아 사실상 쓰레기장이 휴게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쓰레기들이 정리된 분리수거장 한 켠에 의자와 난로 등 청소노동자의 생활용품이 있다./사진=김창현 기자

"이 곳이 분리수거 아저씨 휴게실이기도 한데…"

최저 기온 영하 3.4도의 칼바람이 불던 지난해 11월29일. 서울 종로경찰서 담장 아래 분리수거장에는 입구부터 무릎 높이로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경찰서 청소 직원의 말마따나 수거장 안에는 누군가의 흔적이 있었다. 살을 에는 바람과 함께 코를 찌르는 악취가 뒤늦게 밀려왔다.

고개를 넣어 살펴보니 수거장 안쪽 벽에는 로션, 수건 등이 두서없이 놓여있었다. 때 묻은 냉장고에서는 생수와 비상약, 먹다 남은 감도 나왔다. 조그만 TV까지 보고 나니 이곳이 누군가의 공간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서울 시내 경찰서 3곳 중 1곳에서 일하는 분리수거 노동자들의 휴게공간이다.

분리수거장=휴게실…최소한의 휴식도 보장되지 않는 곳
6일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서울 경찰 31개서 중 12곳(38.7%)이 고용노동부 휴게실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부 가이드라인상 청소노동자 휴게실 면적은 노동자 1인당 1㎡ 이상이다. 노동자가 1명이어도 휴게실 최소면적은 6㎡ 이상 확보돼야 한다. 서울지방경찰청 산하 31개 경찰서 가운데 5곳은 이를 충족하지 못했다. △종로서(없음) △강북서(5㎡) △구로서(4㎡) △양천서(5㎡) △수서서(3.9㎡)다.

성동서는 9.9㎡로 고용노동부 기준을 충족했으나, 분리수거 쓰레기 저장공간과 노동자 공간이 분리되지 않았다. 분리수거 노동자가 사용하는 공간만 실제 측정한 결과는 4㎡로 고용부 기준에 미달했다.

가이드라인은 또 휴게실을 오염물질에서 떨어진 곳에 설치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분리수거장과 근접한 곳도 3곳으로 확인됐다.

성동서는 휴게실이 분리수거장 바로 옆이어서 노동자가 악취와 폐기물에서 나오는 먼지에 그대로 노출됐다. 종로서와 혜화서는 사실상 분리수거 노동자를 위한 별도의 휴게공간이 없어 분리수거장에서 쉴 수밖에 없는 상태다.

이밖에 서대문과 동작, 강서, 도봉 등 경찰서 4곳은 환기시설이 없고, 서대문서와 방배서 등 2곳은 냉난방 시설이 없다.

서류상으로도 분리수거 노동자의 휴게공간 현실을 파악할 수 있지만 실제 머니투데이가 서울 시내 각 경찰서를 점검한 결과 분리수거 노동자 휴게시설이 수거장과 나뉘어 있지 않거나 화재위험에 노출돼 있는 등 서류보다 더 열악한 실상이 파악 가능했다.

종로서는 분리수거 노동자를 위한 별도 휴게실을 마련하지 않아 '분리수거장=휴게실'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여성 분리수거 노동자 A씨(59)가 사용하는 혜화서 휴게실에 환기 시설은 없고 종이박스, 장판 등을 이어 붙인 바닥엔 때가 가득했다. 벽에는 온열기구, 전자레인지 등이 잔뜩 연결된 멀티탭이 있어 화재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동서 휴게실은 수거장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악취에 그대로 노출됐다. 휴게실 안에도 정리하다 남은 쓰레기가 가득했다. 종이컵을 담은 봉투와 접힌 라면상자, 계란판 등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B씨(77)는 "성동서에서 8년 정도 일해왔지만, 경찰이 다른 곳에 휴게실을 설치할 지 물어온 적은 없다"고 말했다.

가이드라인 있지만, 정부기관인 경찰서가 미준수
고용부는 2018년 5월 사용자가 지켜야 하는 휴게실 면적, 냉난방, 환기 상태 등을 규정한 '사업장 휴게시설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가이드'를 내놓았다. 노동자가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있지만, 정부기관인 경찰서조차 제대로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고용부가 '환경미화·폐기물의 선별처리 업무를 하는 노동자'에게 휴게실을 우선해 설치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앞서 지난해 8월 서울대에서 청소 노동자가 환기가 안 되는 지하 휴게실에서 자다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열악한 현실이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꼼수 경영 "더 큰 사회적 비용으로" 전문가 '경고'
서울종로경찰서에서 일하는 분리수거 청소노동자가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일하고 있다. 종로서는 별도의 분리수거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없어서 쓰레기 저장공간이 휴게공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사진=김창현 기자
경찰은 각서별로 휴게실을 관리하기 때문에 일관된 위생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분리수거 휴게실 관리는 각서에서만 하고 통합 관리는 하지 않는다"며 "올해 예산에 (휴게실 환경) 개선 예산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이 비용 절감 등 관점에서 휴게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공공기관이 청소노동자에 건강, 안전을 위해 필요한 비용을 제때 쓰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다"며 "이 같은 현실은 마땅한 지출을 회피해온 '꼼수 경영'"이라고 지적했다.

고용부 가이드라인 작성에 참여한 정혜선 가톨릭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휴게실과 분리수거장이 구분 안 돼 있으면 천식, 비염 등에 노출되기 쉽다"며 "장년층은 추위·더위에 지속해서 노출되면 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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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 기자 straight@mt.co.kr, 이해진 기자 hjl1210@, 이동우 기자 canel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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