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살에 하루 2000근..아빠가 짊어진 삶의 무게, 中이 울었다

유상철 2020. 1. 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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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중국 사회에 잔잔한 감동 안기는
충칭시 도매시장 짐꾼 란광후이 일상
웃통 벗고 오직 등 가죽과 살에 기대
200근 화물 옮길 때마다 10위안 받아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가족 부양
부패 만연한 중국 사회에 울림 안겨
충칭시 차오톈먼 도매시장의 짐꾼 란광후이가 2010년 등엔 짐을, 오른손으론 세 살 아들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쉬캉핑]

10년 전 중국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진 한장이 있다. 웃통을 벗은 짐꾼이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어려운 짐을 등에 메고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왼손으론 짐을, 오른손으론 어린 아들의 손목을 잡고 있다. 발을 헛디딜까 조심하는 꼬마의 눈빛이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한다. 사진사 쉬캉핑(許康平)이 중국 충칭(重慶)시 차오톈먼(朝天門) 도매시장에서 잡은 중국 일상의 한 장면으로 당시 큰 화제가 됐다.
란광후이가 2013년 중국 충칭 차오톈먼 도매시장에서 짐을 나르고 있다. 하루 평균 1톤의 화물을 나른다고 한다. [중국 인민망 캡처, 쉬캉핑]

이후 쉬캉핑은 틈이 날 때마다 시장을 찾아 이들 부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부자의 10년 동안 삶의 변화가 생생하게 사진 기록으로 남게 됐다. 지난 10년 동안 부자의 생활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나.

사진 속 웃통을 벗은 남성의 이름은 란광후이(冉光輝)다. 그러나 보통 시장에선 짐꾼을 뜻하는 ‘방방(棒棒)’으로 부른다. 충칭 뎬장(垫江)현 사람으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엔 시내로 나와 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2009년 그는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아내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을 데리고 시장으로 이주했다. 짐을 나르는 ‘방방’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시장이 파하는 오후 6시가 되면 돌아온다.

충칭시 차오톈먼 도매시장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하는 짐꾼은 흔히 ' 방방'으로 불린다고 한다. [중국 인민망 캡처, 쉬캉핑]

하루 12~13시간 동안 일하는 셈인데 가벼운 짐은 수십 근(1근=0.5kg), 무거우면 수백 근도 나간다. 보통 200근 정도의 짐을 1층에서 10층까지 계단을 통해 나르는 데 짧게는 10여 분, 길게는 30분까지 걸리며 품삯은 10위안(약 1700원)을 현금으로 받는다.

일하는 방식은 먼저 상의를 벗고 등 가죽과 살에 짐을 얹어 미끄러지지 않게 한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매일 일을 나가며 하루 평균 나르는 짐의 무게는 1톤가량이다. 1년이면 약 350톤을 나르니 지난 10년 동안 그의 어깨로 옮긴 화물 무게는 3500톤에 달한다. 그의 직업만큼 삶의 무게를 확실하게 느끼게 하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다른 비유가 필요 없어 보인다고 중국 인민일보(人民日報)는 전했다.

란광후이는 200근 짐을 1층에서 10층까지 나르고 10위안(약 1700원)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 인민망 캡처, 쉬캉핑]

그의 시장 내 인기는 좋다. “힘이 좋고”, “사람이 믿을 만하다”는 평가가 따라서다. 그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버는 것이지, 훔치거나 속이는 등 다른 부정한 방법으로 한 푼도 탐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는 다른 ‘방방’들과 함께 20㎡ 정도의 작은 판자촌에 살았다. 그러나 월세는 처음 100~200위안에서 300~400위안으로 뛰었다. 게다가 2015년엔 아예 개발에 밀려 판자촌이 철거됐다.

이를 악문 그는 2016년 충칭시 요지인 제팡베이(解放碑)에서 멀지 않은 곳에 60㎡ 크기의 집을 마련했다. 40만 위안짜리였다. 적지 않은 금액을 대출받았다. 그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늘어난 셈이다. 짐 하나에 10위안이면 빚을 다 갚으려면 4만 개의 짐을 날라야 한다.

란광후이의 아들은 판자촌 거주 시절 부엌 등불 아래 숙제를 해야 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쉬캉핑]

이사한 집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다소 어둡기도 한 헌 집이지만 그는 상당히 만족해한다. 아들이 다시는 부엌의 등불 아래서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되고 아내는 월세가 오르고 빗물이 새는 걸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란광후이의 일상은 단출하다. 새벽에 출근해 짐을 나르다 해가 지면 돌아오는 삶의 반복이다. 그가 하루 쓰는 돈은 담배 두 갑과 국수 한 그릇으로 21위안이다. 절약과 근면, 가정 돌보기가 그의 몸에 배었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하지만 생활은 절대 녹록하지 않다. 지난 두 해 정도 경기가 좋지 않아 짐을 나르는 일도 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삿짐을 나르거나 건축자재를 옮기는 일도 부업으로 한다.

중학생이 된 란광후이의 아들은 학급 반장으로 공부도 곧잘 하고 아버지를 닮아 무거운 짐도 잘 나른다고 한다. [중국 인민망 캡처, 쉬캉핑]

언제까지 일을 계속해야 하나. “10년에서 15년 정도 아들이 다 클 때까지 하면 되지 않겠나” 그의 답이다. 처음 사진 속 아들의 나이는 세 살이었는데 이젠 13세로 중학교 1학년 학생이 됐다.

그는 당시엔 아내가 식당 일을 나가느라 아들을 돌볼 수 없어 자신이 일하면서 아들을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들 란쥔차오(冉俊超)는 공부도 곧잘 해 반장인 데다 아버지를 닮아서 70~80근 정도의 짐을 나를 정도가 됐다고 한다.

기특한 건 아버지의 직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아빠의 일이 전혀 하등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사회에 중요한 공헌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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