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중앙일보

67세女 사회경험 많아 성적수치심 없다? 대법, 2심을 꾸짖다

이후연 입력 2020.01.08. 05:30 수정 2020.01.08. 07:1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판다]
[사진 Pixabay]

※‘판다’는 ‘판결 다시 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사회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67세의 여성 택시운전기사에게 있었던 일
2017년 9월 9일 새벽, 택시 운전기사 A(여, 당시 67세)씨는 술 취한 손님을 태우고 운전 중이었다. 그런데 뒷자리에 탄 남성이 갑자기 손을 뻗어 A씨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놀란 A씨는 차를 세운 뒤 "당장 택시에서 내리라"고 했다. 취한 남성은 말을 듣기는 커녕 요금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 A씨는 경찰을 불렀다.

조사 결과 이 취객은 학교 교감선생님이었다. 25년간 일하며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강제추행 혐의로 입건됐지만 교감 김모씨는 보호관찰관에게 선도 교육을 받는 조건(보호관찰선도위탁조건부)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교감 김씨는 이 사건으로 2017년 11월 해임됐다. 하지만 김씨는 불복했고, 결국 법원에 "해임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냈다.

김씨의 주장은 이렇다. "술에 만취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이 사건을 저질렀고, 피해자를 추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억압할 만큼 힘을 쓰지도 않았다. 또 손으로 피해자의 옷 위를 만진 것은 강제추행 중에서도 매우 가벼운 추행에 속한다. 25년 이상 교사로 성실히 근무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데 해임은 너무 가혹한 징계다."


1심 "교사는 일반인보다 엄격한 도덕성 필요"
1심은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해자인 김씨가 교육공무원이라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재판부는 "일반 직업인보다 교사는 더 높은 도덕성과 엄격한 품위 유지가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교사의 비위 행위는 본인은 물론 교원 사회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킬 우려가 있다"며 "또 교사의 비위행위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영향력이나 파급력이 학생들에게 미칠 우려가 크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징계 수준을 정할 때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힘을 쓰지 않았다'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1심 재판부는 "강제추행에서의 폭행은 반드시 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의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힘)의 행사가 있는 이상 그 힘의 대소강약을 불문한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오히려 해임 처분이 상대적으로 약한 징계라고 판단하며 김씨에 대한 징계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


2심 "사회경험 풍부한 67세 여성, 수치심 크지 않아"
김씨는 항소했다. 그런데 2심은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해임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피해자인 A씨가 나이가 많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는 사회경험이 풍부한 67세 여성이고, 피해자의 진술 내용 및 신고 경위에 비춰 보면 피해자가 느낀 정신적 충격이나 성적 수치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했다. 피해자도 그닥 성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씨와 합의까지 했고, 김씨가 워낙 교사로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니 해임은 과도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는 법원 판결에 대해 여성 시민단체 같은 곳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판결"이라며 반발했다. "어린이나 청소년, 젊은 여성만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뒤떨어진 판결"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심급별 판단 내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법 "피해자 나이와 사건의 경중은 별개"
결국 대법원까지 갔다. 지난해 12월 24일 대법원은 "원심(2심)판결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다시 고등법원으로 보냈다.

김씨에 대한 해임은 정당하다는 취지였다. 대법원은 1심과 마찬가지로 "김씨가 교사이며 강제추행이 가벼운 범죄가 아닌 만큼 해임은 정당한 징계"라고 판단했다.

또 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언급한 '사회경험 많은 피해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당시 피해자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과 성적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택시 운전을 중지하고 원고(가해자 김씨)에게 즉시 하차할 것을 요구했다"며 "피해자가 사회 경험이 풍부하다거나 상대적으로 고령인 점 등을 내세워 사안이 경미하다거나 비위의 정도가 중하지 않다고 가볍게 단정지을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성경험 있다고 성범죄 피해 크기 달라지는 것 아냐"
이와 비슷한 성범죄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60세 이상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2014년 493건→2018년 765건으로 1.5배가량 늘었다. 이들 세대 여성 일부가 성범죄 신고를 꺼린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실제 벌어지는 범죄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연도별 노인 대상 성범죄 현황.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런 성범죄 사건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나이를 언급하며 처벌 수준을 낮추려는 시도가 많이 발생한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인 장윤미 변호사는 "2심 재판부가 말한 '사회경험이 풍부한' 이란 표현은 결국 '성관계 경험이 많은' 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며 "피해자가 성관계 경험이 많다는 점을 이용해 변론하고, 그게 재판부에 받아들여지기까지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장 변호사는 "피해자의 사정을 가해자의 감형 사유로 삼으려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판단"이라며 "또한 성 경험이 얼마나 있었는지에 따라 성범죄로 인한 피해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말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판다 판결 다시보기

포토&TV

    실시간 주요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