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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대전환의 해

임기환 입력 2020. 01. 0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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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87] 역사를 바꾸는 큰 사건들이 있다. 그런 사건이 한꺼번에 여럿 일어나게 되면, 그런 해는 역사를 바꾸는 해라고 부를 만하다. 예컨대 1894년은 갑오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해다. 당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숨 가쁜 격동의 시간이었겠지만, 후대에서 보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대전환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642년이 그런 해였다. 이 해에 삼국의 운명을 가르는 여러 큰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순을 무시하고 보자면, 우선 지금까지 몇 차례 다루었던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10월에 있었다. 이 정변은 단지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변란으로 그치지 않았다. 3년 뒤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동북아시아를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던 것이다.

이에 못지않은 중요한 사건이 또 있다. 642년 8월에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킨 사건이다. 신라 변경의 대야성이 비록 요충지라고 하더라도 이 성의 함락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야성 함락 그 자체 때문에 대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야성 함락으로 백제인에게 참수당한 한 인물 때문에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신라 김춘추의 딸 고타소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642년 전해인 641년 3월에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꼭 642년이 아니라서 그렇지, 의자왕의 즉위 자체도 642년과 연결된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야성의 함락 그 사건이야말로 의자왕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의자왕에 대해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의자왕은 영웅적 풍모를 갖추고 있고 군사적 능력도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형제와의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曾子)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어쨌든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 못지않게 백제를 중흥시킬 인물로 많은 백제인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인물임은 틀림없다. 즉위 초의 의자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멸망으로 빠뜨린 무능한 군주가 결코 아니었다.

즉위 후 이듬해인 642년 7월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신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도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하여, 624년에는 6개 성을 공취하는 등 제법 성과도 거두었지만, 그 이후는 그리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공방전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백제의 새 왕이 즉위한 후 1년여 만에 신라 서쪽 영역의 40여 성을 순식간에 차지하였으니, 신라의 조야가 큰 충격을 받을 만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의자왕은 곧이어 8월에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명을 주어 신라 대야성 공격을 명령하였다. 윤충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품석과 그의 부인 고타소를 포로로 잡아 목을 베어 머리를 사비로 보냈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었고, 김춘추는 신라 선덕여왕의 조카뻘이었으니, 결국 신라 왕실의 최고위 왕족의 목을 벤 것이다. 이는 백제 성왕이 포로가 되어 목을 베인 잊을 수 없는 치욕에 대한 복수를 한 셈이었다. 의자왕은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식 1천섬을 주어 두둑하게 포상했다.

김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집어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 맹세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한 데에는 개인의 복수심도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큰 사건이라는 게 꼭 거창한 명분이나 심각한 원인이 있어야 일어나는 게 아니다. 개인의 작은 욕망과 결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적인 대사건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를 역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대야성 : 거창군 황강변 해발 80m의 매봉산에 위치하고 있다. 크지는 않지만 신라의 서변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642년 겨울,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를 방문해 그해 10월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과 마주했다. 신라 왕실의 실력자 김춘추가 왜 갑자기 고구려 평양성에 나타났을까? 그를 맞이한 보장왕, 아니 실권자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느닷없는 방문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백제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김춘추지만 단지 개인적인 목적으로 고구려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이 시작해야할 백제와의 전쟁에는 선덕여왕과 김춘추와 김유신 등 왕당파 집권세력의 존립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대야성 함락으로 신라 서부 방어망의 붕괴를 초래하면서 압량주(지금의 경산)까지 방어선이 후퇴하게 되었다. 신라 조정은 위기감에 사로잡혔고, 패전의 책임은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장인인 김춘추, 그리고 '여주(女主)'인 선덕왕에게로 향했다. 게다가 대야성 지역은 본래 가야 영역으로 김유신, 김춘추 등의 세력기반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회복해야하는 거점이었다.

김춘추가 고구려행을 자처한 것은 고구려와 평화협정을 맺고 백제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신라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고구려와 외교 협상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오판이거나 큰 모험이라는 신라 내부의 비판도 있었을 것이다.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상황이니 자신의 제안이 어느 정도 통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아간 한강 유역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협상할 수 없다며 김춘추의 제의를 거부했다. 연개소문은 왜 김춘추의 평화 협정 제의를 거부하였을까? 발길을 돌린 김춘추가 당으로 건너가리란 불 보듯 뻔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을까? 현재로서는 이런 의문에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연개소문이 한강유역의 반환을 협상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집권 초 불안한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아마도 궁지에 몰려 평양성까지 찾아온 김춘추를 다그쳐 협상의 대가로 손쉽게 한강유역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정치적 지위가 상당히 안정되리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든지간에, 결과적으로 김춘추와의 협상을 거부한 그의 판단은 얼마 지나지않아 고구려의 국운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김춘추는 한동안 감옥에 갇히는 등 굴욕을 겪다가 겨우 고구려에서 탈출했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김춘추의 적대감을 키우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춘추는 고구려에서 겪은 수치심을 씻어야 했다.

642년은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해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입장이 뚜렷하게 갈라졌기 때문이다. 한반도 내에서 세력 판도가 재편되고 있었다. 즉위 초 백제 의자왕은 642년에 대공세를 취했고, 그 결과 대야성을 포함한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연개소문은 642년 10월 쿠데타 이후 자신의 권력 기반의 안정을 위해 대신라 강경책을 추진했다. 신라 김춘추의 강화 요구를 거절한 것이 좋은 예다. 의자왕과 연개소문은 대신라 정책에서 같은 입장이었다.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양국이 손을 잡았다. 643년에는 신라와 당을 잇는 서해안 항구인 당항성을 연합작전으로 공격했다.

이제 신라는 고립되었다. 신라의 조야에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생존을 위해 신라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당과의 연합이었다. 그리고 친당외교의 최전선에는 복수심을 가슴속에 깊이 묻어둔 김춘추가 있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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