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조공의 슬픈 기억이 어른거렸다

고대훈 입력 2020. 1. 10. 00:48 수정 2020. 1. 1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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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실크로드 거점 둘러보니
현실된 '중화민족의 중흥'에 충격
추진력은 중국식 '자유·평등·공정'
분열의 한국 이러다 변방이 되나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중국에 다녀왔다. 시진핑 주석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경유 국가의 언론에 ‘감지(感知) 중국’(Experience China)을 해보라는 행사에 초대됐다. 남중국해~인도양~지중해~남태평양을 연결하는 중국 남부의 해상 실크로드(一路) 거점을 도는 8일간의 여정이었다.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주하이(珠海)·후이저우(惠州),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취안저우(泉州)·푸저우(福州) 등 6개 도시를 2000㎞ 움직이며 둘러봤다.

애초에 큰 기대는 없었다. 우즈베키스탄·키르기기스탄·카자흐스탄·파키스탄·이집트 등 일대일로에 속한 개발도상국 기자 20여 명의 신사유람단에게 신발·봉제·굴뚝 산업 등 ‘세계의 하청 공장’이나 과시하겠거니 했다. 알리바바·텐센트·화웨이가 있다지만 ‘촌스러운’ 중국을 벗어났겠느냐는 알량한 우월감도 작용했다. 허나 착각이었다. 한국 기자로서 중국에서 뭘 감동할까 하는 무지한 선입견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광저우 황푸(黃埔)에선 첨단 드론과 3D 인식 기술을 연구하는 젊은 벤처기업인들의 열정을 만났다. 주하이에선 홍콩~주하이~마카오를 잇는 세계 최장의 강주아오 해상 대교(55㎞)를 보며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의지를 읽었고, 후이저우에선 삼성·LG에 이어 제3의 가전회사로 발돋움한 TCL의 위협을 느꼈다. 샤먼에서는 서울 뺨치는 스카이라인에 주눅이 들었고, 취안저우에선 700여 년 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전한 이슬람 문화권과의 교역 흔적을 발견했다. 푸저우에선 명(明)나라 때 정화(鄭和) 함대가 개척했던 바다 비단길을 되살리겠다는 거대한 비전을 목도했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때가 한(漢)나라요, 그 길을 따라 교역이 활발하게 오간 시기가 당(唐)나라다. 중국은 강력한 한나라와 융성한 당나라, 즉 강한성당(强漢盛唐)의 영광을 그리워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선별했다 해도 버스·기차·배를 타고, 또 걸으며 본 거점 도시들에서 기운이 전해졌다.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의 기운이다. 수천 년 전통 속에 초현대식 첨단 건물이 공존하고, 하늘을 가릴 정도로 수많은 공사 크레인은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보던 21세기 비단길을 향해 꿈틀거리는 중국몽(中國夢) 앞에 소름마저 돋았다.

1인당 GDP 3만 달러에 좀 산다는 나라의 필자가 감동하였으니 5000달러도 안 되는 국가 기자들의 충격은 말해서 무엇하랴. 만찬 때면 대접 나온 중국 관료들은 일대일로 협조와 동참을 당부하고, 기자들은 널리 알리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곁에서 본 바로는, 일대일로에 편입되면 자국의 경제도 덩달아 발전할 것이라는 애국심이 담긴 맞장구였다.

14억 인민이 편히 먹고사는 소강(小康)사회를 이루고, 2049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제국이 되겠다는 게 중국의 원대한 포부다. 답사 중에 흥미로운 구호를 접했다.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라는 제목 아래 쓰인 ‘자유·평등·공정·법치’라는 슬로건이었다. 도로 등 곳곳에 붙어 있었다. 부연 설명문은 이렇게 적었다. “인간 의지·존재·발전의 자유, 법률 앞에서 참여와 권리의 평등, 공평과 정의의 공정, 정치의 기본으로서 법치”라고 했다.

중국인 일행에게 좀 더 물었다. “서양의 시각으로 보지 말라. 중국 특유의 자유·평등·공정·법치가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하고 더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 시대에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또 “시진핑 주석이 젊었을 때 한국 배우 송중기와 닮아 인기가 있다”며 ‘시 황제’의 장기 집권을 옹호했다. 정리하자면, 시 주석과 공산당 일당 체제가 결정하는 가치관이라는 비판이 있겠지만 인민의 사고와 행동에서 명확한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는 의미였다. 우리처럼 위선과 거짓이 낄 틈이 없는 정직한 개념이 일대일로를 향한 통합의 힘일 수 있겠다고 이해했다.

문재인 정부에는 ‘평등·공정·정의’가 있다. 하지만 내편과 네편에 따라 내로남불이 되는 이중적 가치들이자 완벽한 분열을 조장하는 잣대로 변질했다. 선거법·공수처법에 이어 ‘검찰 대학살’로 불리는 보복 인사까지 ‘민주적 독재’를 감행하는 걸 보면 일당 독주의 중국보다 나은 게 뭔지 의문이다.

이번 여정은 머지않은 시간 중국에 알현하는 날이 다시 올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줬다. 실크로드의 실현은 21세기판 조공(朝貢) 질서의 구축을 뜻한다. 2017년 4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황제’ 시진핑의 생각은 말실수가 아니라 진심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 방중 때 얘기한 중국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은 현실이 되는 걸까.

우월한 경제력으로 중국에 호탕하게 객기를 부리던,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난 10~20년간의 호시절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굴기(崛起)를 뻔히 보면서도 걸핏하면 ‘전쟁’ ‘척결’이니 하는 살벌한 정의만 설치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조공의 슬픈 기억이 자꾸 어른거렸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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