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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韓경제, 스페인에 또 뒤지나

손진석 파리특파원 입력 2020.01.10. 03:16 수정 2020.01.10.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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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럽에서 한국과 가장 비슷한 길을 걷는 나라는 스페인이다. 재작년 6월 우파 정부가 부패 스캔들로 갑자기 무너졌다. 집권 국민당 간부들이 업자들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의혹이 확산되자 야권이 뭉쳐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끌어내렸다.

7년 만에 다시 권력을 쥔 좌파 정부는 제법 인기가 있다. 사회당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국민당 정부가 공무원 감축과 연금 지급액 축소로 나라 살림을 되살리던 사이 국민들이 지쳤다는 걸 알고 있다. 작년에 최저임금을 단숨에 22%나 올려 환심을 샀다. 국민당이 해외투자를 끌어오려고 공들인 노동 개혁도 하나둘 무효로 되돌리고 있다. 나랏돈도 다시 풀고 있다. 직전 정권의 반대 방향으로 뱃머리를 확 틀었다.

의회 과반수에 미달하는 여당이 군소 정당을 끌어당기느라 바쁜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사회당이 손잡은 극좌 정당 포데모스는 에너지 국유화와 월세 인상 제한이라는 과격한 정책을 요구한다. 왼쪽으로 더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다. 포데모스로도 과반수에 모자라자 사회당은 바스크나 카탈루냐 지방의 분리·독립을 원하는 소수 정당에도 손짓하고 있다. 권력을 이어가는 데 눈이 벌게져 나라가 쪼개질 가능성이 커지는 걸 방치하고 있다. 한국의 집권당이 작은 정당들을 끌어당긴 '4+1' 협의체로 선거의 룰을 바꾼 행보를 연상케 한다.

스페인은 유럽 국가 중 외형으로도 한국과 가장 가깝다. 작년 기준으로 인구와 경제 규모(GDP)가 스페인은 4660만명에 1620조원이고, 우리는 5120만명에 1880조원이다. 우리가 스페인을 다소 앞서는데 이건 아주 최근에 이뤄진 일이다. 경제 규모는 2013년, 1인당 GDP는 2015년에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제쳤다. 50년 전만 하더라도 스페인 경제 규모가 약 다섯 배나 컸지만 기적처럼 따라잡았다. 16세기 무적함대로 세계를 호령하던 그들을 우리가 넘어선 건 역사가 기록하는 범위에서 처음일 것이다.

스페인은 관광·건축·금융에선 명함을 내놓을 만하다. 하지만 그들은 낮잠 자고 밤늦게까지 여흥을 즐기는 데다, 삼성 같은 세계적인 기술 중심 수출 기업도 없는 나라다. 한번 추월한 이상 격차를 계속 벌리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을 정점으로 스페인과의 격차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17년엔 우리의 1인당 GDP가 스페인에 3196달러 앞섰지만, 3년 만인 올해는 512달러 차이로 크게 좁혀질 전망이다. 긴 세월 걸려 추월한 스페인에 금세 다시 뒤처질 위기다. 두 나라 여당은 왼쪽으로 나라를 아슬아슬하게 끌고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굳이 우열을 가려보면 정상 궤도에서 더 많이 벗어난 쪽이 스페인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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