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필요할 때만 갖다 붙이는 '삼권분립'

임민혁 논설위원 입력 2020. 1. 10.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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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회 수장을 총리로 임명, 국내 정치서 삼권분립 무시
융통성 허용되는 對日 문제선 스스로 발목 묶고 출구 못 찾아
임민혁 논설위원

한·일 관계는 항상 부침(浮沈)을 거듭했지만 작년 한 해는 그 밑바닥을 봤다. 일본의 우경화와 국내의 반일(反日) 포퓰리즘이 악순환을 일으키며 양국 정치권뿐 아니라 일반 국민까지 감정 골이 깊어졌다. 원상 회복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어떤 식이든 일본과 타협·절충하는 일은 인기가 없기 때문에 총선에 사활을 건 문재인 정권이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도 별로 없다. '죽창가' 선동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전후로 많은 전문가가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 한·일 관계 파탄을 막아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문 정부는 '삼권분립'을 내세우며 사실상 손을 놨다. 대통령이 직접 "사법부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고 했고, 민정수석은 '다른 의견을 말하면 친일파'라고 했다. 정부가 퇴로를 스스로 끊은 셈이다. 사법부 결정대로 하려면 일본이 식민 지배 불법성을 인정하고 사과·배상해야 한다. 이를 바라지 않는 한국 국민은 없다. 문제는 일본이 순순히 따를 가능성이 0%라는 것이다. 대책 없이 "일본은 개과천선하라"고 외치는 것은 시민 단체가 할 일이지 국정을 책임진 정부의 전략이 될 순 없다. 정부는 막연히 미·북, 남북 관계가 잘 풀리면 일본이 '왕따'를 면하기 위해 굽히고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한반도 정세는 그 반대로 흘러갔다. 안일한 오판의 결과는 참담했다.

'삼권분립 논리'에 발이 묶인 한·일 관계에서 뒤늦게 출구 전략으로 떠오른 것이 '국회 입법'을 통한 해결이다. 삼권의 또 다른 축인 입법부가 움직여준다면 행정부가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 문희상 국회의장이 대표 발의한 '1+1+α' 강제징용 법안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청와대·외교부는 공식적으로는 문희상법과 상관없다고 주장하지만, 외교부 관계자는 "물밑 교감 없이 이런 게 나올 수 있겠냐"고 했다. 정계 은퇴를 앞둔 국회의장이 사실상 총대를 멨다는 얘기다. '한·일 기업(1+1)안에 민간 성금을 더하고, 간접적으로 한·일 정부 보증도 포함한다'는 문희상안은 초창기에 정부 TF에서 논의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청와대는 "개인 아이디어"라고 거리를 두면서도 여론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친정부 언론들은 "갈등 해소를 위한 대화의 단초" "진지하게 검토할 만하다"며 지원 사격을 했다. 하지만 시민 단체들이 "일본에 면죄부를 준다"며 거세게 반발하자 청와대는 "피해자 동의 없인 안 된다"며 발을 뺐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아베 총리와 회담하면서 "대법원 판결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며 다시 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이고 존중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국제 관계와 충돌하는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국내 법을 이유로 국제 문제상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된다는 게 국제법의 기본 원칙이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한국 문제에 대해 내린 판결을 일본 정부가 한국에 강요할 수 없듯이,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내 정치에서 삼권분립을 철저하게 지키되 외교 문제에선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거꾸로다. 불과 2년여 전까지 입법부를 대표했던 전직 국회의장을 행정부 2인자인 총리로 지명했고, 대통령이 사법부 수장에게 명령 내리듯 "전 정부 사법 농단 의혹을 반드시 규명하라"고 했다. 삼권분립 존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면서 국제 문제에서 행정부의 역할을 촉구하는 고언에는 "삼권분립 모르냐"며 눈을 부라린다. 필요할 때만 꺼내 쓰고 아쉬울 때 그 뒤에 숨는다. '삼권분립 내로남불'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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