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혁명'이 뜯어고친 이탈리아 사회 [책과 삶]

홍진수 기자 2020. 1. 10.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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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
ㆍ존 풋 지음·권루시안 옮김
ㆍ문학동네 | 640쪽 | 2만5000원

바잘리아가 고리치아에서 본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감옥과 같았다. 보호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미친’ 사람들을 격리함으로써 ‘정상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의 저자인 존 풋이 제작한 유튜브 영상 ‘프랑코 바잘리아와 이탈리아 정신질환자 보호소의 폐쇄’의 한 장면.

1978년 이탈리아는 정신질환자 보호소를 폐쇄하는 ‘180호 법’을 제정했다. 기존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없애거나, 최소한 새 환자를 수용할 수 없게 했다. 당연히 새로운 정신질환자 보호소도 세울 수 없었다. 정신질환자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했고, 이들에게 빼앗았던 권리(투표권, 자신의 치료에 대한 통제권, 바깥세상에서 살 권리)를 돌려줬다.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이탈리아에는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없다.

180호 법의 다른 이름은 ‘바잘리아 법’이다. 이 모든 것이 프랑코 바잘리아(1924~1980)의 ‘무모한’ 혁명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은 바잘리아 그리고 그와 함께한 혁명가들의 이야기다.

192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바잘리아는 반파시스트 활동을 벌이다 스무 살에 체포됐다. 반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대학에 진학했고, 정신의학으로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러나 학계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갈 곳을 찾던 1961년 말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고리치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asylum·사실상의 정신병원) 소장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잘리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잘리아가 고리치아에서 본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감옥과 같았다.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들어가는 순간 환자는 ‘비인격자’가 됐다. 창문에는 창살이 꽂혀 있고 병동 문은 자물쇠로 잠겼다. 고문과 자살은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그곳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는 말까지 환자들 사이에 나왔다. 보호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미친’ 사람들을 격리함으로써 ‘정상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감옥생활을 경험했던 바잘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고리치아에 소장으로 부임한 첫날, 수간호사가 그날 밤 묶여 있는 사람 명단을 건네며 공식 승인을 요청했을 때 그는 말했다.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외진 곳에서 출세할 가망이 없는 직책을 맡았다는 사실의 이점 하나는 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바잘리아는 ‘점진적 개혁’부터 시도했다. 의사와 환자 간의 위계를 없앴고, 환자들에게 ‘자기 결정권’을 일부 돌려줬다. 환자들은 환자복 대신 자신의 옷을 입었고, 언제 잠자리에 들고 언제 일어날지 스스로 결정했다. 보호소 안에 주점이나 클럽도 만들어 운영했다. 병원 구성원 전체가 참석하는 아셈블레아(집회)도 매일 오전 열었다. 바잘리아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이 개혁과정을 <부정되는 공공시설>(1968)이란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전 유럽을 강타한 ‘68혁명’의 바람을 타고 많은 지지를 받았고 고리치아는 ‘68세대’의 성지가 됐다.

바잘리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보호소 시설을 그대로 둔 채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리치아에서 트리에스테 정신질환자 보호소로 자리를 옮긴 뒤 과감히 병원 폐쇄의 길로 나아갔다. 보호소 담장만 허무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대안으로 지역 곳곳에 협동조합을 구성했다. 환자들이 일터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이 협동조합은 보호소에 격리돼 있던 환자를 사회로 다시 통합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풀려난’ 환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화살이 바잘리아에게 돌아왔다. 1968년 조반니 미클루스라는 환자가 아내를 죽이자 바잘리아는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당했다. 1973년 조르다노 사바린이 그의 부모를 죽였을 때에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977년에는 마리아 레티치아 미켈라치가 네 살 난 아들을 목욕시키다 익사시켰다.

그러나 ‘대세’는 바뀌지 않았다.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이탈리에도 흐르던 ‘68혁명의 기운’이 힘을 실어줬다.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혁명적 언어에 실제적 개혁이 뒤따른 특별한 시대였다. 발두치가 주장한 대로 ‘정신병원은 사회의 척도’라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이탈리아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정신의학자, 환자, 간호사, 자원봉사자 등을 비롯한 사람들이 새로운 ‘일하는 방식’을 실험했다. 젊은 사람들이 환자들을 위해 삶을 바쳤다. 계급구조가 무너지고 뒤엎어졌다.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변화와 희망의 중심이 되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다.”

1978년 이후 이탈리아 정신질환자 보호소의 대부분은 공원이 됐다. 일부는 박물관, 학교, 공동주택으로 변했다. 이탈리아 사회는 그곳에 수용돼 있던 10만명의 환자 대부분을 흡수했다. 이 책은 자부심이 한껏 담긴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그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에 의해 폐쇄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일자리를 없애버렸다. 그것도 영영.”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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