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길병원 간호사는 지하주차장에서 옷을 입는다

김성호 2020. 1. 1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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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병원, 간호사 탈의실로 주차장·해부실습실 지정
소방·건축법 저촉 가능성.. 사용자 기본의무도 위배

[파이낸셜뉴스] #길병원 응급실 간호사 A씨는 업무가 끝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 주차장으로 향한다. 탈의실이 주차장 구석에 있기 때문이다. 탈의실이라곤 하지만 본래 엘리베이터가 있던 공간에 사물함을 들여놓은 게 전부다. 공간이 비좁아 팔을 뻗기도 불편하다. 심야 시간대 교대가 이뤄지는 응급실 여성 간호사들에게 어두운 지하주차장이 친숙한 공간이 아닌 건 물론이다.

같은 병원 일반 병동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B씨는 차라리 A씨가 부럽다. B씨가 이용하는 탈의실은 가천관 지하 2층에 있다.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에 비하면 쾌적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공간이 3년 전까지 해부실습실이었다는 데 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대에 해부실습실로 쓰던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인체를 다루는 간호사에게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길병원 간호사들은 지하3층 주차장 구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 앞 공간에서 간호복을 갈아입는다. 길병원은 올해부터 간호사들에게 해당 공간을 사용하라고 통보했다. 사진=김성호 기자

인천시 구월동에 자리한 가천대학교 길병원(원장 김양우)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성장을 거듭해온 지역 중심 의료기관이다. 연 매출은 진료비 기준 3000억원을 훌쩍 넘어서 전국 8위 규모다. 지난해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가 의료인력과 병상수, 각종 서비스 지수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발표한 순위에선 17위를 기록했다. 인천지역 의료기관 중에선 인하대학교병원에 이어 2위다.

9일과 10일 찾은 길병원 일대는 다양한 전문병동이 규모 있게 들어서 거대한 의료단지를 이루고 있었다. 복합쇼핑몰을 보는듯한 세련된 건물 사이로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이 바쁘게 오고 갔다.

■소방·건축법 무시하고 지하주차장에 탈의실 설치
기자가 길병원을 찾은 건 한 통의 제보 때문이었다. 길병원 간호사들이 이용하는 탈의실이 지하주차장에 있다는 황당한 얘기였다. 건실한 재정의 유력 대학병원이 간호사 탈의실을 지하주차장에 두고 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직접 방문했다.

놀랍게도 제보는 사실이었다. 지하주차장 3층 구석 좁은 공간에 응급실 간호인력 60여명이 사용한다는 탈의실이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들어서자 사물함으로 가득 들어찬 비좁은 공간이 나왔다. 탈의실이라기보다 사물함을 쌓아둔 창고처럼 보였다. 본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장소인 듯 한쪽 벽면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사물함으로 막아두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이동하는 통로는 몹시 비좁아서 한 팔을 벌릴 수도 없었다. 간호사들은 매일 출근 후와 퇴근 전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시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안전문제가 심각해보였다. 기자가 탈의실에 접근하는 동안 막아서는 건 문 앞에 달린 도어락 하나가 전부였다. 탈의실에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지하3층 주차장은 저녁시간대임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여러모로 몰카 및 성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다.

더구나 좁은 공간에 사물함을 잔뜩 들여놔 출구조차 절반이 막혀 있다. 화재나 성범죄 등 안전상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탈출할 통로가 마땅치 않다.

이에 대해 소방청 화재예방과 관계자에게 문의했더니 “비상구 아래에 물건을 놓은 걸 보니 피난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어 문제의 소지가 있다”며 “관할 소방서가 현장확인을 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해봐야겠지만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소방법뿐 아니라 건축법에도 저촉될 우려가 있다. 건축업계 관계자는 “건축물 허가를 낼 때 공용면적과 전용면적을 신고하도록 돼 있는데 엘리베이터 앞을 탈의실로 전용하는 건 법에 저촉되는 사항”이라며 “관할 지자체가 점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 공간이 탈의실로 쓰인 건 아니다. 현장에서 만난 병원 노조 관계자는 “본래 검진센터 7층에 탈의실이 있었다”며 “병원이 탈의실을 다른 용도로 쓰기로 결정한 뒤 주차장에 만든 탈의실을 쓰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고 설명했다.

길병원 응급실 간호사들은 지하주차장을 지나 구석진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 공간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사진은 탈의실 입구. 사진=김성호 기자

■해부실습실로 쓰던 외진 공간도 탈의실로 변신
취재 중에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더 알게 됐다. 길병원 내 또 다른 건물인 가천관 탈의실은 불과 3년 전까지 해부실습실로 쓰였다는 것이다. 중환자실과 일반병동 간호사가 사용하는 이 탈의실은 이용자만 200여명에 달하는데, 이용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해당 탈의실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장치조차 없이 사물함으로 구획을 나눠놓고 있다. 실제 남성인 기자가 여성 전용 탈의실에 들어설 때까지 제지하는 장치도, 사람도 없었다.

한 간호사는 “아무리 간호사라지만 시체 해부하던 공간에서 혼자 옷을 갈아입는다고 생각하면 소름끼치게 무서울 때가 있다”며 “사람 없을 때는 불 끄라고도 하는데 담력훈련이라도 하라는 건가”하고 불평했다.

길병원에서 근무하다 최근 이직했다는 또 다른 간호사는 “햇볕도 안 들고 환기도 안 되는 곳을 탈의실로 쓰는 간호사가 자긍심을 갖고 일을 할 수 있겠나”라며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생각한다면 이렇게는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제가 있는 탈의실은 이뿐만이 아니다. 암센터 간호사들은 옆 건물인 인공지능센터 17층 빈 병실을 탈의실로 사용한다. 이곳은 병실로 등록돼 침상이 놓여있던 공간으로, 이를 탈의실로 전용하는 것 역시 법에 저촉될 우려가 있다.

이곳을 사용하는 간호사들도 불만이 상당하다. 이동시간이 많이 드는 건 물론, 별도의 잠금장치가 없어 안전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수년 간 병원 탈의실은 범죄의 표적이 돼 왔다. 지난해 전라남도 순천의 한 종합병원 탈의실에서 몰카 촬영을 당한 피해자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해당 병원 탈의실 역시 길병원과 마찬가지로 사물함으로만 구획을 나눠놓은 상태였다.

지난해 부산과 울산의 대학병원에서도 의사가 탈의실에 몰카를 설치해 간호사를 몰래 촬영하다 적발됐다. 2015년엔 서울대병원 산하 병원 소속 의사가 탈의실에서 몰카를 촬영해 징역형을 받았다. 해당 의사가 2012년에도 같은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사실이 공개되자 공분이 일기도 했다.

길병원 가천관 지하 2층 탈의실 입구. 도어락 등 외부인 출입을 막는 장치가 따로 없다.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이곳은 사람들의 통행이 적은 지역에 위치한 데다 3년 전까지 해부실습실로 쓰여 간호사들의 불만이 상당하다. 사진=김성호 기자

■열악한 탈의실 제공 ‘사용자 기본의무’ 위배
길병원 시설팀 역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한다. 시설팀 직원들은 별도 탈의실 없이 근무처인 보일러실 내부에 마련된 좁은 공간에서 작업복을 갈아입는다. 길병원 노조는 10일 소식지를 내고 해당 공간에 대해 ‘천장이 천막으로 덮여 있고 바닥도 썩어가고 있다’며 직원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길병원 노조 관계자는 “병원이라는 곳이 심야에도 교대가 있고 그러다보면 늦은 시간에 혼자 옷을 갈아입을 일이 많다”며 “근무공간과 멀리 떨어진 데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공간을 탈의실로 쓰라는 건 병원이 직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다만 이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규제책은 미비한 게 사실이다. 박성우 노무사(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회장)는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규정은 산업안전보건법의 위임에 따라 고용노동부에서 정한 '산업안전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의 휴게실 관련 규정밖에 없는데 그것도 미비하다”며 “사용자의 기본의무, 그러니까 근로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근무하도록 하는 안전배려의무에 근거해보면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쾌적한 공간을 제공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위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길병원 관계자는 "임시로 탈의실을 쓰고 있는 거고 다시 원상복구를 하기로 했다고 들었다"며 "(현재 탈의실이) 법에도 저촉이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해 월요일까지 입장을 밝히겠다"고 전했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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