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목표는 9급 공무원" SKY도 줄섰다

김지섭 기자 입력 2020.01.15. 03:10 수정 2020.01.1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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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공화국] [下]
청년취준생 10명 중 3명 '공시족'

서울대 공대를 나온 A(29)씨는 지난해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에 붙어 구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학원을 다니다 뒤늦게 9급 공무원으로 진로를 바꿨다. A씨는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았다"며 "고시를 준비하자니 실패했을 경우 대책이 없을 것 같아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9급을 택한 것"이라고 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지난 2018년 서울의 한 구청 9급 직원에 임용된 B(26)씨는 대학교 3학년인 22세 때 9급 시험 '3관왕'을 했다. 국가직을 비롯해 서울시, 지방직에 모두 붙은 뒤 졸업 후 서울시 공무원이 됐다. B씨는 "조기 퇴직할 가능성이 큰 기업에 가면 40~50대 이후의 삶이 암담할 것 같았다"며 "대학 간판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시대가 됐고, 인생에서 한 번 거쳐 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청년들 사이에서 '공무원'이 인기 직업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들까지 '9급 시험'에 응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되고, 근무 연수에 따라 월급은 꼬박꼬박 오르는 공무원이 되기 위해 매년 수십만 명의 청년이 응시하는데, 명문대생들도 고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격이 쉬운 9급 공무원으로 몰리는 것이다. 지난해 5월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년(15~29세) '공시족' 규모는 21만9000명으로 전체 취업준비생(71만4000명)의 30.7%에 달한다. 청년 취준생 10명 중 3명은 공시생인 셈이다.

한 중앙부처 국장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SKY 출신은 대부분 고시만 바라볼 뿐 7급 시험도 잘 안 봤는데, 이제는 9급으로도 꽤 많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시대가 변했음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A씨와 B씨처럼 명문대 출신임에도 9급 시험에 응시하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SKY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이미 상당수 학생이 9급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다니는 학원에 서울시 9급 준비하는 서울대생이 3명이나 있다"(고파스·고려대 커뮤니티) "기업 다니다 35세에 지방직 9급으로 들어와 다니고 있다"(스누라이프·서울대 커뮤니티) "도서관 열람실 지나가면 9급 공무원 교재 펴놓고 공부하는 학생들 많다"(고파스) 등 9급 시험을 준비하거나 합격한 SKY 학생들의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B씨도 "대학 친구 중 7급은 물론 9급 시험 준비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자신을 '국가직 9급 워킹맘'이라고 소개한 서울대 졸업생은 "자녀가 만 5세 이하면 임금 삭감 없이 2시간 단축 근무를 할 수 있어서 매일 오후 4시 퇴근하는데 너무 행복하다"며 "9급으로 들어가는 것이 처음에는 자존심 상할 수 있지만 호봉 차곡차곡 올라가고 승진하고 '워라밸(일과 여가의 균형)'은 극강이라 생각보다 괜찮은 선택"이라고 했다.

◇"人材 블랙홀 된 공무원, 나라 미래 어두워"

'안정성'과 '여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공무원의 장점 때문에 대기업까지 그만두고 9급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도 많다. C(32)씨는 4년간 다니던 대기업을 관두고 지난해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C씨는 "대기업에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나만 잘하면 오래 버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40대만 돼도 짐 쌀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더라"며 "나중에 육아휴직 쓰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뒤늦게 9급 시험 도전이라는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현상은 10대도 예외가 아니다. 이달 초 찾은 서울 송파구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정문에는 공무원 시험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학교에선 지난해 4명을 비롯해 2014년부터 총 16명의 9급 합격자를 배출했다. 일신여상은 '국가직 지역인재 9급 공무원 시험'을 대비하는 특별반을 운영하고 있다. 특별반 2학년 김아리새(18)양은 "요즘 인문계고에 진학해 대학을 가도 대부분 공시생이 되는데 그럴 바에 특성화고에 진학해 하루라도 빨리 공무원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역인재 전형은 특성화고 및 전문대생만을 대상으로 선발해 일반 9급 시험보다는 준비하기에 수월하다. 지난해 210명을 선발하는 지역인재 전형에 도전한 고등학생은 333개 학교 1041명에 달했다. 전남의 한 특성화고 교사 김모(47)씨는 "요즘 특성화고 사이에선 공무원을 얼마나 배출하느냐가 학교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라며 "입학설명회 때도 그 부분을 가장 중점적으로 설명한다"고 말했다. 일반 9급 시험에 도전하는 고등학생도 급증하고 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지난해 9급 공채에 응시한 18~19세 지원자는 2392명으로 2015년(1387명) 대비 72.5%나 늘었다. 지난해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1020'(13~29세)들은 가장 선호하는 직장으로 국가기관(22.8%)을 꼽았다. 공기업(21.7%)까지 합하면 전체의 절반 가까이(44.5%)가 공직을 희망하는 셈이다. 대기업(17.4%) 선호도의 2.5배에 달한다.

성균관대 구정우 교수는 "문재인 정부 들어 시장이 주도해야 할 '일자리' 영역까지 국가가 나서 공무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다"며 "인재를 공무원으로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안정성만이 최고의 가치가 된 나라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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