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잘못 들어선 중재자의 길

노석조 정치부 기자 2020. 1. 15.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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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석조 정치부 기자

아라비아반도 귀퉁이에 오만이란 나라가 있다. 이 나라의 지도자 술탄 카부스가 지난 10일 별세했다. 오만은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석유가 많이 나지도 않고, 두바이처럼 화려한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소위 '잘나가는' 나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숙환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 술탄 카부스의 부음(訃音)에 세계 지도자들이 앞다퉈 이 작은 반도국을 직접 찾아 조문했다. 영국 찰스 왕세자, 보리스 존슨 총리가 12일 이른 아침 수도 무스카트에 도착했다. 친이란 무장단체 후티와 내전 중인 예멘의 하디 대통령, 이란의 자리프 외무부 장관도 잠시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내려놓고 빈소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등 주요 국가 정상들은 성명으로 술탄 카부스를 애도했다.

미·이란 강경 대치로 더욱 어수선해진 중동 정세에서도 줄 잇는 각국 정상의 조문은 술탄 카부스의 외교적 위상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그가 세계의 화약고라는 중동에서 오랜 기간 소리 소문 없이 중재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왔기에 존경을 받는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그는 2015년 이란 핵협상을 타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란은 미국을 '거대한 사탄'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적대적인 두 나라가 핵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던 데는 양쪽의 입장을 차분하게 전달·조율한 술탄 카부스와 오만 외교관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주목되는 건 이렇게 큰 공을 세웠는데도 이 핵 합의 관련 공식 석상에서 술탄 카부스나 그의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북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라는 우리 정부는 오만과는 정반대인 듯하다. 중재를 제대로 못 했는데도 잘했다고 성과를 부풀리거나, 협상 당사자가 중재 역할 못 맡기겠다고 대놓고 비방하는데도 아무 소리 못 하고 쩔쩔맨다. "오지랖 넓은 중재자"가 "중뿔나게 끼어든다"며 "주제넘은 일 집어치워라"고 하는데도 "나는 중재자다"라고 되뇌며 자기암시를 하는 모양새다. 얼마 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10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전달해달라는 당부를 자신에게 했다고 자랑하듯 방미 결과를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바로 다음 날 "이미 직접 친서를 받았다"면서 "한국은 중재자 역할에 미련을 갖지 마라"고 했다.

중재는 존경받을 때 가능하다. 내가 무시하는 사람에게 전 재산과 생명이 걸린 중대사를 맡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북핵을 인 우리는 협상의 당사자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점이다. 북핵 피해자가 중재를 하려 하니 잘될 리가 없다. '핵무장' 가해자 북한이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 국민에게 큰소리치고 욕설을 퍼붓는 이 어이없고 비참한 현실은, 애초 중재자가 되겠다는 잘못된 '대북 정책'이 세워질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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