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립스틱 바르는 94세 의사, 9시 출근해 병실 회진.. 100세 현역 어찌 꿈이랴

남양주/김민철 선임기자 입력 2020.01.15. 03:21 수정 2020.01.1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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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100세 행복 프로젝트] [3] 정년은 없다, 한원주 내과 과장
무료진료 봉사하다 12년전 은퇴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겠다" 요양병원과 다시 종신계약 맺어
건강 비결? 무조건 움직이는 것.. 친구와 실버타운 10바퀴씩 돌아

"환자들 만나는데 당연히 눈썹 그리고 립스틱 발라야지? 뭐가 이상하다고 자꾸 물어봐요."

94세 현역 의사인 한원주 매그너스요양병원 내과 과장이 지난 8일 오전 회진에 앞서 거울을 보며 립스틱으로 화장을 고치고 있다. 한씨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지난 8일 남양주 매그너스요양병원 복도에서 한원주 내과 과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1926년생으로 올해 94세다. 한씨는 검은색 펜슬로 눈썹을 그렸고 입술엔 립스틱을 엷게 발랐다. "출근하는 사람이 화장하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그는 "입원 중인 할머니들에게도 '나이 들고 보는 사람 없어도 크림, 로션 바르고 꾸미라'고 권해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살아 있어야 건강하다는 증거거든"이라고 했다. 몇 년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한씨가 제대로 근무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나온 적이 있다고 했다. 아흔이 넘은 현역 의사가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병원 관계자는 "컴퓨터도 잘하시고 의학 전문 용어도 잘 알고 활기차게 진료하는 것을 보고 아무 소리 못 하고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오전 9시 출근… 회진 빼먹는 일 없어

한씨는 2008년부터 12년째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오전 9시 출근해 하루 20여명의 환자를 둘러보고 처방을 내린다. 그는 "오전에 회진하고 환자 증상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오후에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는데 페이스북 열어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말했다. 5층 병실로 올라간 한씨는 누워 있는 환자를 보면 "일어나보라"고 권했다. 산소포화도 측정기 수치를 조정하고 환자의 산소마스크를 바로잡아주기도 했다. 이 병원 나숙희 상담실장은 "한 과장님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진료하시니 환자들이 잘 따른다"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현직에서 일하는 최고령 여의사일 것"이라고 했다.

한씨는 1949년 경성의학여자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를 졸업하고 산부인과 전문의를, 남편과 함께 미국에 유학 가서 내과 전문의를 땄다. 귀국해서 개업해 돈도 벌 만큼 벌었다. 그러나 40년 전쯤 남편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계기로 잘나가던 병원을 접고 의료선교의원을 운영하며 어려운 환자들을 무료 진료했다. 12년 전 거기서도 은퇴하고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83세에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나이 들어도 눕지 말고 움직여야"

건강 비결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바쁘게 활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후 5시 30분 저녁을 먹고 실버타운 친구들과 함께 사는 건물을 10바퀴씩 돈다고 했다. 한 바퀴에 100보라 1000보를 걷는다고 했다. "그걸로는 부족해서 시간만 나면 걷는다"고 했다. 주말에 서울 집에 갈 때도 딸이 차를 갖고 데리러 온다는 걸 마다하고 병원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는 것이다. 지난해 9월까지는 서울 집까지 2시간 거리를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녔다.

한씨가 환자의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점검하는 모습. 한씨는 12년째 하루 20여명의 환자를 둘러보고 처방을 내리고 있다. /남강호 기자

한씨는 환자들에게도 움직일 수 있으면 무조건 움직이라고 주문하고 있다. "옛날에는 '무조건 쉬라'고 했는데 누워만 있는 환자가 빨리 숨지더라. 살아 있는 동안엔 움직이면서 자기 할 일 하면서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암보다 무서운 것이 치매인데, 할 일 없이 우두커니 있으면 치매가 빨리 온다"고 했다.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

한씨는 마음가짐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기쁘게 살면 우리 몸에서 엔도르핀이 나와 병이 잘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혈압도 높고 심장과 콩팥도 좋지 않고 녹내장까지 있다. 나이 들면 병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며 "그런 것은 약으로 조절하면서 기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자 한씨는 "내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기로 병원과 계약했다"고 말했다. 한씨가 작년 가을 낸 에세이집 제목이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다. 그는 "할 수 있는 때까지 일하다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네, 갑니다'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환자들을 보니 돈을 많이 벌어도 빨리 은퇴한 사람들은 치매도 빨리 걸리고 일찍 죽더라"며 "사람들을 만나면 '빨리 은퇴하지 마라. 그래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꼭 써달라고 했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동안 기쁘게 살며 내 할 일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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