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청천까지 생체실험' 日 만행 자료 내밀며 5년간 매주 NIH 설득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0. 1. 1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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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연구윤리 교재 바꾼 재미 과학자 가족의 집념]
조박 교수, 연구윤리 강의듣다가 유대인 생체실험 기록은 있는데 731부대 만행 빠진 것 이해 못해
어머니·형·동생과 함께 연구하며 NIH가 수년간 무관심 일관해도 메일과 전화로 지속적 수정 요구

'일본 제국주의 731부대는 한국의 저명한 시인인 윤동주와 독립 투사 영웅인 이청천 같은 한국인 수감자와 민간인에게 생체 실험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과학자 30여만명이 교육받는 미 국립보건원(NIH) 교재 내용 일부다. 이는 과학자 집안인 조박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 가족의 5년 넘는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실릴 수 있었다.

731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중국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세균전 부대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 포로와 구속자 3000여명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아 각종 세균 실험과 약물 실험을 자행했다. 1940년 이후 매년 '마루타' 600명이 생체 실험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루타는 인체 실험 대상자를 일컬으며, 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다.

조 교수는 2014년 록펠러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던 당시 NIH의 연구 윤리 강의를 들었다. 교재 연보 '1939~45' 항목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유대인에게 자행한 생체 실험이 기록돼 있었다. '독일 과학자들은 수용소 포로들을 몸이 얼 정도의 낮은 온도에 놔두고 기압을 낮추거나 방사선과 전기를 가하고 전염병에 걸리게 하는 등 극악무도한 연구를 자행했다. 연합군은 독일 과학자들을 전범으로 처벌했다'는 내용이었다.

조박(큰 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는 과학자인 형제, 어머니와 함께 5년 넘는 노력 끝에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윤리 연보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인체실험 만행 기록을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래 사진 왼쪽에서부터 한의사·연구원인 어머니 박인애씨, 의사·연구원인 형 조인씨, 하버드대 의대 교수인 동생 조윤씨. /조박 제공

당시 그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731부대의 생체 실험이 연보에서 빠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 교수는 이때부터 주변 사람에게 물어물어 NIH 연보 작성 담당자를 찾아내 '731부대 만행을 연보에 실어 달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후 조 교수의 가족이 모두 731부대 자료 수집에 나섰다. 그는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일본 정부나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 정치인·과학자에게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까 우려해 가족끼리 감당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2014년 10월 14일부터 작년 12월 31일까지 매주 NIH 연보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조 박사 가족이 한국을 비롯해 중국·러시아에 남아 있는 731부대 생체 실험 피해자의 증언 기록과 사진 같은 공식 자료를 모아 첨부했다. 윤동주 시인의 일본 자료도 수집했다. 수시로 전화도 걸었다.

하지만 NIH는 수년간 무관심과 무시로 일관했다. 조 박사는 "수없이 좌절했다"고 기억했다. NIH가 처음 반응을 보인 건 3년 만인 2017년이었다. 조 박사 가족의 노력이 빛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독일 과학자들이 잔악무도한 연구를 전쟁 포로들에게 자행했으며, 일본 과학자도 중국인 포로에게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는 내용 한 줄뿐이었다. 조 교수 가족은 이후에도 NIH에 정확한 역사 기록을 요구했고, 결국 한국인 피해를 포함해 731부대가 저지른 만행 전반을 연보에 싣도록 했다.

올해 새롭게 나온 NIH 연구 윤리 연보는 '1932~1945년' 항목에 '일본군 731부대 과학자들이 중국인 전쟁 포로 수천 명에게 극악무도한 생물·화학무기 실험, 백신 실험과 생체 해부를 포함한 상처 치료와 수술 연구를 자행했다'고 적고 있다. 이어 '미국 정부는 생물·화학무기 연구 자료를 넘겨받는 대신 일본 과학자들을 전범으로 처벌하지 않는 데 합의했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731부대 만행을 묵인했다는 내용까지 기재된 것이다. 연보는 일제의 만행을 아홉 줄로 기술해 독일군의 생체 실험 기록(여섯 줄)보다 자세히 담았다.

조 교수 가족은 과학자 집안이다. 조 교수는 건설교통부 공무원을 지낸 아버지 조억호(79)씨와 어머니를 따라 초등학교 6학년 때 캐나다로 이민 갔다. 조 교수 삼형제는 모두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 의대를 졸업했다. 조 교수는 "맥길대를 다닐 때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 독립운동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가족과 함께 준비한 게 이번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과학자로 자란 삼형제는 2005년 생명과학 분야 최고 학술지인 '셀'에 초파리 배아의 분화 과정을 연구한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늘 '기회가 되면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며 한국 역사와 한국어를 철저하게 가르치셨어요. 어머니는 한국에 다녀오면 한국 역사와 예술에 대한 책을 잔뜩 사 와 우리에게 조국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 교수 형제는 부모 뜻을 따라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을 때면 의료 봉사를 하기도 했다. 조 교수는 "개정된 연보가 나중에 일본의 영향으로 바뀌지 않도록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며 "의학자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좋은 소식을 국민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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