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 개돼지로 살아보니

안혜리 입력 2020. 1. 17. 00:20 수정 2020. 1. 17.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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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얕보는 청와대·여당 폭주에
둘로 쪼개진 '개돼지 나라'로 전락
노무현에 부끄럽지도 않나
안혜리 논설위원

개돼지. 요즘 세태를 관통하는 대표 키워드는 단연 ‘개돼지’가 아닐까 싶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불길한 예언서로 읽히던 현 정권 초반부터 슬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니 지난해 9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전후로 아예 국민 단어가 됐다. 도덕성과 위선은 둘째치고 온갖 의혹으로 온 가족이 수사받는 인물을 굳이 법무부 장관에 앉힌 데 대해 이언주 의원은 항의표시로 삭발하며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것”이라고 날을 세웠고,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국민들이 ‘우리를 개돼지로 아느냐’고 분노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을 무시하는듯한 오만한 인사권 행사를 맞닥뜨린 보통 사람들 역시 망연자실한 채 광화문 광장으로 뛰쳐나와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다”라고 항변해야 했다.

눈길을 끄는 건 개돼지의 일등 덕목인 맹목적 지지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 정권 지지자들도 개돼지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가령 한 전교조 소속 교사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조국 관련 뉴스를 모조리 가짜로 규정하며 “조국 뉴스를 믿으면 개돼지”라 했고, 조국 얘기만 나오면 거의 이성을 잃는 소설가 공지영은 “이게(조 장관 낙마) 먹히면 우린 조중동자한(주요 보수 언론과 자유한국당)에게 영원히 개돼지”라며 ‘조국 반대=개돼지’ 공식을 들고나와 선동에 앞장서 왔다.

한마디로 지금 대한민국은 서로가 서로를 개돼지라 손가락질하며 둘로 찢어진 나라가 됐다.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세력이 누구인지, 또 누가 개돼지 노릇을 자처하는지는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어느 쪽 의견을 따르더라도 우리가 지금 개돼지 신세인 것만은 분명한 모양이다.

이러니 ‘나향욱의 재발견’이라는 자조적인 한탄마저 시중에 떠돈다. 박근혜 정부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그는 2016년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영화 ‘내부자들’에 빗대 “99%의 민중은 개·돼지,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발언해 파면됐다. 불과 몇 년 뒤 이렇게 개돼지 나라의 국민이 되고 보니 그가 진실을 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그때 그는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는데 길게는 이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부터, 짧게는 조국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 8월부터 막상 개돼지로 살아보니 그건 영 아닌듯싶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조국 전 장관을 언급하며 “지금까지 겪었던 고초만으로도 아주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며 국민들더러 “이젠 놓아주라”고 했다. 국민이 안 된다는 인물을 기어이 써서 나라를 두 동강 내놓고는 범죄로 조사 받는 걸 ‘고초’라 표현하며 오히려 국민을 탓하다니, 아무리 우리가 개돼지여도 이쯤되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지난 대선 때 문 대통령을 지지했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국민을 개돼지로 보고 능멸하고 있다”고 맹공을 퍼부었을까.

여론에 떠밀려 철회하긴 했지만 청와대가 조 전 장관 가족의 수사를 인권침해라며 국가인권위에 송부한 걸 비롯해 이 정부의 비상식적 폭주는 이루 다 헤아리기도 어렵다. 상식은커녕 법치 부정과 헌법 무시도 예사다. 자기편 수사 방해 의도로 검찰총장 의견을 배제한 채 손발 자르기 인사를 강행하고도 거꾸로 총장더러 항명했다고 징계 방안을 찾으라 하질 않나, 같은 진영 사람들조차 반발하는 청와대 압수수색 거부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한다.

청와대가 이러니 장관이며 여당 의원 등도 딱 그 수준으로 국민을 대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부동산 급등에 ‘타다’ 문제까지 손대는 것마다 재앙 수준의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김현미 국토부 장관(민주당의원)이 비판적 발언을 한 자기 지역구 주민에 “물 나빠졌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고,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며 장애인을 비하하는 망언을 예사로 하는 것도 다 이런 인식인 듯싶다. “증거 인멸이 아니라 증거 보존”이라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궤변도 빼놓을 수 없겠다.

국민을 개돼지 삼으며 신뢰와 공정, 아니 보다 근본적인 옳고 그름의 가치관마저 무너뜨린 이 정권을 보고 있자니 “한 사회의 가치관이 거꾸로 서 있거나 가치 판단이 흔들릴 때, 잘못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지식은 어떤 도둑질이나 살인보다 위험한 범죄”라던 누군가의 비판이 떠오른다.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얘기다. 그는 『여보, 나좀 도와줘』에서 국민을 속이고 무시하는 머리 좋은 사람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걸핏하면 노무현 정신 운운하는 이 정권 사람들이 분명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인데,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정작 개돼지들만 부끄러워하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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