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만큼 두려운 '물 부족'

이정호 기자 입력 2020. 1. 1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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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국제 연구기관 ‘WPS’ “이라크, 물 부족으로 폭력 행위 발생” 예측

2018년 10월 이라크 바스라 지역의 하천. 같은 해 여름 이 지역에서는 12만명이 수질오염으로 입원했다. 더 뉴 휴머니테리언 제공

이란은 가셈 솔레이마니 전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제거한 미국 정부에 대해 이달 초 보복성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한밤중에 이라크 내 미군기지로 날아든 10여기의 미사일로 커다란 불기둥이 솟구치는 모습을 전 세계인은 생생히 지켜봤다. 오랜 앙숙이었던 이란과 미국이 전면전을 벌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즉각 제기됐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사일 공격으로 사상자가 없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추가 군사보복이 아닌 경제제재로 이란과 적절한 수준의 긴장 관리에 나섰다. 미국의 무기가 다시 하늘을 갈랐다면 중동 전체가 격랑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미국과 이란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짧지만 ‘전장’이 됐던 이라크의 국민은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통해 전쟁이 가져오는 참혹함, 그리고 전후에 나라가 어떤 위기에 처하는지를 생생히 경험했다는 점에서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바닷물 유입·강 오염으로

안전하고 깨끗한 물 줄어들어

대규모 병원 입원…시위 촉발

작물 못 자라 식량·경제 타격

사회 안정 흔드는 변수로 부상

그런데 이라크 국민을 위기로 빠뜨리는 건 사실 미사일뿐만이 아니다. 국제 연구기관인 ‘물, 평화 그리고 안보(Water, Peace and Security·WPS)’의 최근 발표 내용을 보면 올해 이라크는 물이 부족해 ‘폭력 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WPS가 정의하는 폭력 행위란 1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날 수 있는 소요를 말하는데, WPS는 이 여부를 1년 전에 86% 확률로 예상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미 이라크에서는 물 부족으로 인한 사회 불안이 심화하고 있다. WPS에 따르면 이라크의 유전지대이며 주요 도시인 바스라에서는 페르시아만에서 올라오는 짠 바닷물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하류로 유입되는 오염물질 탓에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믿고 마실 수 없는 물이라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섭취하면서 2018년에는 12만명이 병원 치료를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높은 실업률과 전기 부족 같은 문제까지 겹치며 당시 바스라에서는 분노한 시민 수천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이 발포로 응수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 부족은 마실 물이 모자라다는 점 말고도 더 구조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무엇보다 농업이 직격탄을 맞는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분석한 중동 지역 자료에 따르면 바스라에서 시위가 촉발됐던 2018년 여름 이라크 농무부는 쌀과 밀, 옥수수, 참깨와 같은 곡물 재배를 중단했다. 성장에 많은 물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기온과 강수량 부족으로 물을 댈 수 있는 면적이 국토의 절반에 그치자 나온 긴급조치였다.

이라크인 5명 가운데 1명은 농업에 종사한다. 작물을 키울 수 없게 된 농민들이 경제적 손실을 입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재배가 중단된 곡물은 대부분 주식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라크 내 먹거리 공급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에서 물 부족이 사회 안정을 흔드는 중요한 변수로 부상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WPS와 협력하는 국제단체인 ‘인터내셔널 얼럿’(International Alert)의 기후변화 전문가 제시카 하토그 연구원은 “이라크의 깨지기 쉬운 평화가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이라크와 함께 올해 가장 심각한 물 부족 국가로 WPS가 꼽은 말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말리에선 니제르강 인근 국가들까지 가담한 댐 건설 공사가 이어지면서 물 부족 문제가 가속화되고 있다. 니제르강 삼각주의 기름진 환경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100만명 이상의 농민과 어부, 목축업자들이 궤멸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물 부족으로 전쟁 발생 않지만

가난·불평등 결합 땐 위협”

WPS 자료를 보면 파키스탄과 인도에서는 부족한 물에 대해 폭력을 동반해 항의하는 일이 농민들 사이에서 흔하고, 나이지리아에서는 한정된 물을 차지하기 위해 농민과 목축업자들이 죽고 죽이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미군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에 나섰던 이란에서도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이란 남서부 도시인 호람샤르와 아바단에서 2018년 식수 부족이 격렬한 시위를 촉발시키면서 시위대와 경찰이 물리적으로 맞붙는 일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소재 국제수리환경공학연구소(IHE)의 수잔나 슈마이어 수석연구원은 영국 언론 가디언 인터뷰에서 “물 부족만으로 갈등이나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며 “하지만 가난과 불평등이 결합된다면 위협적인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엔은 2050년까지 세계에서 50억명이 물 부족을 겪을 수 있다고 전망한다. 물을 두고 지구촌에 폭력이 난무한다는 줄거리의 <매드맥스> 같은 영화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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