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뇌물이 된 장학금

염태정 2020. 1. 20.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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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육성에 쓰여야 할 장학금
권력자에 접근하는 통로 안돼
철저수사·공정재판만이 해법
염태정 정책부디렉터

새 학기를 앞두고 훈훈한 장학금 소식이 이어진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93세의 장경례 할머니는 이달 초 2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전남대에 장학금으로 내놨다. 전남 장흥군의 4남매는 고향의 어려운 학생을 위해 써달라며 320만원을 기탁했다. 20년 넘게 남몰래 장학금을 기부해온 70대 관세사의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해 말에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이혜민씨가 한국 국적으론 처음으로 영국 로즈 장학생에 뽑혀 화제가 됐다. 세계에서 유명한 장학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로즈 장학금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제임스 풀브라이트(1905~1995) 미국 전 상원의원 등 쟁쟁한 인물이 많이 받았다. 또한 풀브라이트는 로즈 장학생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프로그램을 만들어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국제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는 데 기여했다.

장학금이란 이런 거다. 어려운 학생을 돕고, 그들이 잘 자라 사회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바탕에 있다. 그런데 요즘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장학금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자식을 연결고리로 힘있는 자에게 접근하는 뇌물성 장학금이다. 서울행정법원은 최근 미성년자인 딸의 장학금 명목으로 민원인에게 돈을 받은 경찰관의 강등 처분은 적절하다고 판결했다. 이 경찰관은 민원인의 요청으로 미성년자인 자신의 딸 명의 통장을 건넸다. 민원인은 이 통장에 장학금 명목으로 세 차례에 걸쳐 모두 299만원을 보냈다고 한다. 이게 발각되면서 강등됐다. 재판부는 “경찰관의 딸에게 장학금을 줄 명목으로 통장에 입금했더라도 피고인과 민원인의 관계, 자녀가 미성년자인 점을 고려하면 경찰관이 이를 받았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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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중 부산의료원장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에게 준 장학금도 있다. 노 원장은 의학전문대학원생인 조 전 장관 딸에게 6학기 연속으로 학기당 200만원씩 모두 1200만원의 장학금을 줬다. 조씨는 성적은 나빴고 집안은 부유했다. 검찰은 지난달 말 조 전 장관을 기소하면서 노 원장도 뇌물 공여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노 원장은 “학업 격려” 차원에서 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검찰 공소장을 보면 이해 안 되는 구석이 한두 곳이 아니다. ‘사회적 지명도와 영향력이 있는 교수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과장에게 자신을 지도교수로 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국 전 장관과)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조국 전 장관이) 딸의 유급을 우려하는 문자를 보내자 담당 교수에게 부탁해 성적을 (파악해) 미리 알려줬다’ ‘장학금 재원이 소진되어 자신이 개인 자금으로 지급하였다’ ‘(조국 전 장관도) 장학금 지급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다’…. 노 원장은 지도교수 배정은 임의로 하는 것이고, 조 전 장관을 개인적으론 알지 못한다고 말해왔다. 기소 후엔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공소장을 읽다 보면 허탈하기도 하고 화도 난다. 자식을 좀 더 나은 학교에 보내려 애쓰는 부모는 부모대로, 학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학생은 학생대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론 조국 같은 부모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도 든다. 대학생 10명 중 3명은 ‘빚을 내거나 일을 해서’ 등록금을 마련한다. 절반 이상은(55.3%) ‘등록금이 가계에 매우 부담된다’고 여긴다(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실 조사). 학부모단체 ‘교육 바로 세우기 운동본부’가 지난 14일 “청와대는 인권위에 보낸 ‘조국 전 장관과 가족 수사과정에서 빚어진 인권 침해 청원’을 당장 회수해라. 더는 조 전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지 말라”고 한데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신년사에서 특권과 반칙을 과감히 개선하겠다고 했다. 부모의 영향력이 자녀에게 대물림되고 이로 인해 청년들이 사회 시스템 자체를 불신하는 일을 고치겠다고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조국 수사팀은 해체 분위기고, 문재인 대통령은 ‘마음의 빚’을 이야기한다. 조국 전 장관 수사와 재판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이 부모 찬스 쓰는 걸 넘어서 자식을 연결 고리로 이득을 취하려는 인사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공정한 재판이 불신 회복의 첫걸음이다.

염태정 정책 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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