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 인생 70년, 용인 백암농악을 전국 최고로 이끌다

용인시민신문 황연실 입력 2020. 1. 2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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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를 지켜온 사람들] 백암농악 차용성

[오마이뉴스 용인시민신문 황연실 기자]

지역 고유의 향토문화는 고유성과 차별성으로 지역의 문화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용인시 향토문화재는 3호까지 지정돼 있다. 향토민속 제1호는 용인 할미성 대동굿, 2호는 경기향토소리, 3호는 포곡상여놀이로 각각 2016년과 2017년, 지난해 지정됐다. 그러나 일부 향토문화를 지키고 보존해온 인물이나 관리단체는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은 채 자비를 모아 어렵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는 고령으로 먼저 세상을 등졌다. 본지는 용인의 소중한 향토문화 중 문화재 지정이 시급한 소유자나 단체를 만나보고 소개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 편집자 주 

쩍쩍이 겹가락, 암수탈…백암농악 특색 
보존회 둘로 나뉘며 문화재 지정 '고배'

 
 백암농악을 이어오고 있는 차용성(왼쪽)선생과 백암농악보존회 차진복 회장
ⓒ 바른지역언론연대
현존하는 민속예술 가운데 농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농악은 음악과 노래, 춤, 이야기가 어우러진 종합 예술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각 지역별 특색을 갖춘 농악으로 마을 주민을 위로하고 흥을 돋았던 농악이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쇠퇴를 거듭해 아예 자취를 감춰 버린 지역도 많다.  

그러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서 전해져 내려온 백암농악은 어려운 시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활발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백암장의 우시장에서 씨름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사당패들이 들어와 한바탕 놀고 물러나곤 했다. 백중날 동네의 큰 잔치가 열리는 곳에서 풍물을 치고 박첨지놀이 등을 하며 장터의 흥겨움을 더한 것이다. 모내기를 할 때는 농민 전체가 참여하는 대동놀이로, 김매기를 할 때는 소리꾼이 논두렁에서 북치며 선소리를 하면 일꾼들이 후렴을 매기는 김매기 소리를 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문화말살정책으로 사라졌던 백암농악은 해방이 되며 다시 시작됐고 1950~1960년대 초까지 크게 번성했다. 그러다 19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과 근대화가 진행되며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 속에서 번성과 쇠퇴를 반복하면서도 지금까지 백암농악을 지켜오고 있는 이가 차용성(93) 선생이다. 

"백암장에서 남원용 선생이 노는 모습을 보는데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어. 그래서 배우기 시작했지." 차 선생은 안성 남사당패 이원보 선생의 제자인 남원영·이필재 선생에게 농악을 전수받은 김익수 선생에게 기능을 배웠다. 18세 때 소고를 배우고 상모를 돌리며 두레패에서 활동을 시작해 40대 때 비로소 상쇠(가장 앞에서 전체 음악을 지휘, 꽹과리)를 잡기 시작했다.  

차 선생의 둘째 아들이자 백암농악을 이어받고 있는 백암농악보존회 차진복(62) 회장은 어렸을 때 흥겹게 상쇠를 잡던 아버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6살 때 백암 백중장 마당에서 아버지가 혼자 쇠를 치시면서 노시는데 머리에 쓴 북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치셨던 게 아직도 생생해요." 

백암농악은 다른 지역 농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고유의 가락 12채를 그대로 이어오면서 다른 농악에서는 볼 수 없는 암탈과 수탈이 들어가고 고유가락을 겹가락으로 구성하는 쩍쩍이 가락이라는 특유 가락을 사용한다. 

이렇게 지역 특유의 농악으로 충북농악제에서 대상을 차지하고 다른 지역에 초대 받아 공연을 할 만큼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차용성 선생이지만 용인 향토문화재 지정에는 고배를 마셨다. 백암농악을 전수해 함께 농악을 해오던 후배들이 다른 지역에 보존회를 세우면서 둘로 나눠졌고, 시가 둘 다 지정은 힘들다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매년 10회까지 이어져오던 정기공연도 끊겼다. 

"지역에서 재정적 지원이 없기 때문에 회원들이 자비를 모아 보존회를 운영하고 있어요. 젊은 후계자를 양성하고 2세 3세를 키워나가야 하는 데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 보니 힘들죠."

차용성 선생은 90세를 넘어서며 백암농악의 재현과 보존을 차진복 회장에게 넘겼다.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의 기억을 자랑스럽게 간직한 채다. 

"꽹가리를 들고 마당으로 들어가서 겹가락을 여러 가지로 펼쳐서 늘어놓으면 다들 '어이구, 꽤 괜찮게 치는 사람이 있네' 했지.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 최고였어."

그런 아버지를 보며 차진복 회장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꽹과리를 내려놓으신 지 2년 정도 지났어요. 이제는 기력이 없으시니 힘들어하시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백암농악을 잇기 위해서는 향토문화재 지정이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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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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