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한국경제 'J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이상렬 2020. 1. 21. 00: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물가·저성장·고령화 일본 닮아
장기불황 빠지면 벗어나기 어려워
규제 혁파, 소주성 기조 전환 필요
이상렬 콘텐트제작 Chief 에디터

흉보면서 닮는다고 했나. 한국 경제가 딱 그 꼴이다. 곳곳에서 ‘일본화(Japanification)’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199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이 겪은 일들이 한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물가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사상 최저(0.4%)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전반적인 물가수준을 나타내는 GDP디플레이터는 4분기 연속 하락했다. 정부의 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다. 이쯤 되면 일본이 겪은 디플레이션의 전조(前兆)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디플레는 경제에 독을 퍼뜨린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거나 바닥을 기면 소비도 생산도 시들해지기 때문이다.

인구감소와 고령화도 일본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한국은 사실상 인구 감소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10월의 출생아 수는 2만5648명, 사망자 수는 2만5520명. 인구 증가율은 ‘제로’로 수렴했다. 올해는 감소가 본격화한다.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이미 2017년 감소세로 돌아섰다. 일본의 생산가능인구는 95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령화는 대략 20년의 간극을 두고 일본을 좇아가는 것으로 관찰돼왔는데 이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한국의 인구 감소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임연령 여성 1인당 출산율은 2018년 0.98명이지만, 일본은 1.42명이다.

근로시간 감소가 경제에 타격을 입힌 것도 한·일의 닮은꼴이다. 생산성은 향상되지 않았는데 근로시간이 줄면 생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본은 1980년대 후반 법정근로시간을 주당 48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했다. 이것이 장기불황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분석들이 있다. 한국은 1년 반 전 주52시간제를 도입해 근로 투입량을 묶었다. 사업주는 일손 부족으로 공장 가동에 어려움을 겪고, 근로자는 추가로 일할 수 없어 수입이 줄어들었다.

서소문포럼 1/21

금리 정책의 약발이 한계치에 도달한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0년간 제로에 가까운 금리를 유지했지만 경기를 살리지 못했다. 한국의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인 1.25%. 그때의 일본이나 지금의 한국이나 금리가 비싸서 투자가 부진하고 소비가 위축된 것이 아니다.

정치는 또 어떤가. 양국 정치 모두 경제의 고질병을 풀어내지 못했다. 수십여 년의 장기 불황 동안 일본의 부실채권처리는 더뎠고, 재정건전화는 실패했고, 노동개혁은 지지부진했다. 한국의 정치는 아예 경제를 발목 잡고 있다. 온갖 규제가 4차 산업혁명의 싹을 자르고 있는데도 규제는 제때 풀지 않고 되려 ‘타다금지법’을 만든다. 오죽하면 벤처기업인들이 ‘규제개혁비례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설까.

사람들이 일본화를 염려하는 것은 저성장·저물가가 맞물려 고착화하는 장기 불황에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버블 붕괴 후 일본 경제가 기신기신하던 수십년간 일본을 지켜보면서도 일본의 실패를 배우지 않았다. 그 사이 한국의 인구 증가 그래프는 꺾이고 있었고, 경제를 일으켜 세울 개혁다운 개혁은 추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장률이 추락하고, 수축사회가 가속화하는 일본의 비극을 남의 일로만 여겼다.

사실 일본화는 한국만의 사건도 아니다. 고령화는 선진국의 공통 현상이고, 3저(저물가·저성장·저금리)는 세계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사정없이 돈을 찍어낸 후유증으로 각국의 금리 인하 여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그만큼 일본화는 선진 경제권에서 보편적 현상이 돼가고 있고, 각국은 저마다 일본화 늪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국의 정책 한계는 분명하다. 일본 같은 기축통화국도 아니고, 글로벌 무역의 외풍을 심하게 탄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 기업과 개인이 활력을 되찾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기업가의 창의성을 고사시키는 규제를 혁파하는 것, 강성 노조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는 노동 시장을 개혁하는 일, 멀쩡한 경제를 골병들게 한 소득주도성장 기조를 바꾸는 일 등이다. 그런 당연한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서 세계 각국의 일본화 탈피 경쟁에서 한국만 낙오하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상렬 콘텐트제작 Chief 에디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