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남정호의 시시각각] 해리스 대사는 할 말을 했다

남정호 입력 2020.01.21. 00:36 수정 2020.01.2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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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별관광, 북핵 문제와 직결
전체 수출 넘는 '캐시 카우' 될 수도
친일 프레임 덧씌운 인신공격 치졸
남정호 논설위원

북한 개별관광에 대해 “한·미 간 협의를 거쳐야 한다”고 밝힌 해리 해리스 미국대사. 이 발언을 문제 삼아 여권이 ‘내정 간섭’ ‘조선 총독’ 운운하며 그를 몰아세우는 것은 온당한가.

외교 사절은 주재국 내정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건 국제사회의 불문율이다. 하지만 대사를 주고받은 두 나라가 함께 관련된 중대사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본국의 위임을 받은 대사로서는 자국 입장을 밝히는 게 결코 이상하지 않다.

여권은 북한 개별관광을 남북교류 차원의 국내 문제로 몰아가려 한다. 하지만 어떤 궤변을 늘어놔도 북한 관광은 북핵과 떼어놓을 수 없다. 단체든, 개인이든 북한 관광을 허용하면 김정은 정권에 막대한 돈이 흘러 들어갈 게 뻔한 탓이다. 이는 경제제재로 북한을 압박해 핵무기를 포기하게 만들자는 국제사회의 공조를 거스르는 일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북핵은 우리만이 아닌, 국제사회의 문제다.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은 런던·뉴델리·베이징 등 어디든 떨어질 수 있다. 특히 “미 제국주의에 맞서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게 김정은 정권의 공언인 만큼 북핵 위협은 미국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혹자는 개별관광을 두고 쩨쩨하게 구느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별거 아닌지 따져보자. 2008년 박왕자씨가 북한군에 의해 피살되기 전까지 금강산 관광은 큰 인기였다. 2006년엔 24만 명, 2007년엔 남북 정상회담 등 화해 분위기에 힘입어 34만 명이 금강산을 찾았다.

스웨덴에 위치한 북한 전문 여행사 ‘코리아 콘설트(Korea Konsult)’에 따르면 베이징~평양 간 고려항공편 왕복 항공료를 포함, 4박5일간 북한을 돌아볼 경우 (6~9명 그룹으로 4성급 호텔 투숙 시) 1인당 요금은 1280유로(약 160여만원). 저렴한 동남아 관광에 비할 바 아니나 꿈에 그리던 북녘땅을 밟기 위해서는 낼 만도 한 액수다.

절정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한 해 30만 명이 간다 치자. 그럴 경우 북한에 떨어질 돈은 4800억원. 이에 비해 2018년 북한의 전체 수출액은 3860억원에 불과했다. 3년간의 대북제재 탓에 2016년 3조5100억원에서 10분의 1로 줄었다. 결국 개별관광도 잘만 되면 북한의 전체 수출액을 성큼 넘어설 수 있다는 얘기다. 참고로 죄다 관광객은 아니지만 2018년 한국인 여행객은 일본 750만 명, 베트남 340만 명, 태국 170만 명, 필리핀 160만 명에 달했다. 이렇듯 개별관광은 북한의 핵무기·미사일 고도화에 결정적 기여를 할 ‘캐시 카우(cash cow)’가 될 게 뻔하다. 그러기에 핵 위협의 당사국 미국에 나서지 말라고 하는 건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요구다.

해군 제독 출신의 해리스 대사가 세련된 외교관 어법에 서툴고 다소 거칠게 얘기한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가 못할 말을 한 건 아니다. 한때 미국대사가 굴곡진 우리 정치의 골목골목에서 깊숙이 간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 대사가 대통령을 만나 이래라저래라 한 것은 노태우 정권 때가 마지막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 이후 한국이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 문턱까지 도약하면서 미 대사는 주로 외교부 차관을 상대하는 수준으로 영향력이 줄었다. 그러니 ‘조선 총독’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자기 비하다.

더 고약한 건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과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점을 문제 삼아 ‘친일 프레임’을 덧씌운 채 공격하는 치졸한 행태다. 해외에서는 콧수염 기르기는 개인의 취향일 뿐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를 일제 총독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기 충분하다.

다민족 국가 출신 대사를 인종이나 출신 성분으로, 그것도 모계 국적으로 평가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미국에서 누구보다 위안부 문제를 열성적으로 제기했던 장본인이 일본계 마이크 혼다 전 하원의원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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