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잘못된 말, 잘못된 사과

양성희 입력 2020. 1. 22. 00:46 수정 2020. 1. 2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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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대표의 장애인 비하 발언
실언도 모자라 영혼 없는 사과
낮은 인권감수성, 반성하시길
양성희 논설위원

또 하나 ‘실언 리스트’를 추가했다. 연일 낮은 인권 감수성으로 ‘진보 꼰대’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얘기다. 민주당 유튜브 채널에서 총선 ‘영입 인재’ 1호인 척수장애인 최혜영 강동대 교수 얘기를 하면서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된 분들은 정상적으로 살던 것에 대한 꿈이 있어서 더 의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장애인의 의지에 대한 자의적 진단에, ‘장애=비정상’이란 낡은 인식이 드러났다. 장애인 비하·혐오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대표는 2018년 민주당 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서도 “정치권에 저게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들이 많이 있다. 신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이 있다”고 발언했다. 장애인 행사에서 ‘장애=하자·열등함’이라고 못 박은 셈이다. 그 밖에 경단녀의 재취업난이 노력 부족 때문이라거나(“경력 단절 제 딸, 뭘 열심히 안 해”), 여성을 물건 고르기에 빗댄(“한국 남성들이 베트남 여성을 선호한다”) 실언도 유명하다.

이번 발언에 비판이 쏟아지자 이 대표는 “장애인에게 상처를 준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그런) 분석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서 한 말인데,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상처를 줬다고 하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상처를 줬다고 하면 죄송하다’는 표현부터가 마지못해 하는 조건부 사과, 상대의 과민함이 문제라는 뉘앙스다. ‘상처 줘서 미안하다’는 말에도 상대를 내려다보는 태도가 숨어 있다. 누군가를 때려놓고 ‘때린 게 상처라면 미안하다’고 하는 셈인데, 때리는 게 잘못임을 반성하고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과의 ABC가 빠졌다.

사회심리학자 아론 라자르는 『사과에 대하여』에서 “거짓으로 사과하는 이들은 자기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거나, 진정으로 후회하고 있음을 상대에게 표현하지 않으며, 앞으로 달라지겠다는 약속을 포함한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실수가 있었다면’이라는 조건부 사과, ‘당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처럼 피해를 의심하는 사과, ‘피해를 주었다니 유감’이라는 교만한 태도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모욕을 안기는 실패한 사과’다. 장애인,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표 떨어지는 소리’에 여론 무마용 영혼 없는 사과도 거짓 사과, 실패한 사과다. 비슷한 실언이 반복되는 이유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저자인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씨는 “우리의 언어습관 자체에 누적된 장애 비하가 있고, 50대 이상 정치인들에게는 장애를 젠더·인종·지역 같은 정체성을 이루는 중립적 속성으로 보는 대신 치료·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인식이 익숙하다”면서도 “장애를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립적 속성으로 보는 인식은 세계적으로 점점 보편적이며, 20세기 중반 이후 장애인 인권 운동과 그 결과 형성된 인권 규범(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17조 등)으로 공식화됐다. 21세기 정치인이라면 이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고 SNS에 썼다.

이 대표의 실언 이후 당 안팎에서는 총선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이런 후진 감수성으로 장애인 인재 영입이 무슨 의미일까. 아직도 장애는 치명적 결함이나 ‘천형’으로 여겨지며, 장애인은 세상에 없는 듯 존재를 부정당할 때가 많다. 그들에게 비하도, 동정도 없이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사람이 먼저’라는 정치가 할 일 아닌가.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기보다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게 21세기 장애인 인권의 출발이다. 한편 자유한국당은 이에 대해 “뼛속까지 장애인 비하가 몸에 밴 것”이라고 이 대표를 맹비난하다가 “비뚤어진 마음과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장애인”이라는 모순적 논평을 내놨다. 자기분열적 장애인 비하, 코미디가 따로 없는데 웃을 수가 없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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