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칼럼] 이재용, '응분의 죗값'이 '준법의 출발'이다

안재승 2020. 1. 2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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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승

‘준법’은 법을 지키는 것이다. 법의 심판을 피하면서 준법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응분의 죗값을 치러야 준법을 말할 자격이 있다. 21세기 하고도 20년,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개탄하고 있어야 되겠는가.

그래픽 김지야

대법원 판결은 요지가 명확했다. 지난해 8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상고심에서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작업에 도움을 기대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뇌물을 줬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 최고 정치권력과 최고 경제권력이 결탁한 정경유착으로 본 것이다. 이 부회장이 회삿돈을 횡령해 건넨 뇌물 액수도 36억여원에서 86억여원으로 늘어났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은 횡령액이 50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대법원 판결로 파기환송심에선 2심과 달리 집행유예 선고 가능성이 희박해진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재판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가 지난해 10월 첫 공판에서 “이번 재판 진행이나 결과와 무관하다”고 전제한 뒤 “삼성그룹 내부에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준법감시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피고인이 이런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미국 연방 양형 기준 8장과 그에 따라 미국 대기업들이 시행하는 실효적인 감시제도를 참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2일 삼성은 준법감시위원회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 17일 열린 4차 공판에선 이 부회장의 변호인이 준법감시위원회 운영 방식을 브리핑했고, 정 부장판사는 “준법감시위원회가 효과적으로 운영되면 양형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이재용 집행유예’라는 각본을 미리 짜놓고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지 않으면 되레 이상할 지경이다.

미국 연방법원 양형 기준 8장은 ‘기업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이다. 기업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 경영 활동을 하다가 저지른 범죄에 적용하려고 만든 것이다. 반면 이 부회장의 불법행위는 ‘개인 범죄’다. 자신의 경영권 승계라는 사익을 위해 회사에 막대한 피해까지 입혔다. 미국 연방법원 양형 기준 8장을 ‘이재용 재판’에 적용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또 이 규정의 취지는 준법감시기구를 잘 갖추고 있는 기업이 불법행위를 저질렀을 때 벌금형을 줄여주는 것이다. 사후에 준법감시기구를 만들었다고 해서 감형을 해주는 제도가 아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따라야 할 우리 대법원의 횡령죄 양형 기준에는 준법감시기구 같은 건 아예 없다. 양형 기준을 보면 압력에 의한 소극적 범죄, 피해 회복, 오로지 회사 이익 목적, 심신 미약, 생계·치료비 목적, 진지한 반성 등 17가지 형량 감경 요소가 있다. 이 중 이 부회장에게 적용될 수 있는 건 횡령액 변제에 따른 피해 회복이 유일해 보인다. 반면 범행 수법 매우 불량, 피지휘자에 대한 교사, 지배권 강화나 지위 보전 목적, 증거 은폐 등 형량 가중 요소 10가지는 걸리지 않는 게 거의 없다. 대법원 양형 기준을 따른다면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는 정상 참작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이 부회장은 가중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동안 삼성에 준법감시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총수 일가의 불법·비리가 되풀이됐던 것도 아니다. 삼성은 2005년 ‘엑스파일 사건’ 때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을 만들었고, 2008년 ‘이건희 비자금 사건’ 이후엔 ‘무관용 준법 경영’을 선포하고 각 계열사에 ‘준법 경영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또 금융회사지배구조법과 상법에 따라 삼성생명 등 금융 계열사는 준법감시인을, 삼성전자 등 비금융 계열사는 준법지원인을 두고 있다. 검찰과 법원의 계속된 봐주기 수사와 솜방망이 판결 탓에 총수 일가의 불법·비리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만약 이건희 회장이 자신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다면 이재용 부회장이 법정에 서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준영 부장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이 사건은 삼성그룹 총수와 최고위직 임원들이 계획하고 가담한 횡령 및 뇌물 범죄”라고 규정했다.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그렇다면 그냥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면 된다. 생경한 미국 연방법원의 양형 기준까지 끌어와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칠 일이 아니다.

‘준법’은 말 그대로 법을 지키는 것이다. 법을 어겼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법의 정당한 심판을 빠져나가려 하면서 준법을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응분의 죗값을 치러야 준법을 말할 자격이 있다. 21세기 하고도 20년이 됐다.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개탄하고 있어야 되겠는가.

논설위원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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