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근무복 가져가는 백의의 천사들 [병원 근무복 세탁 실태점검 1]

김성호 입력 2020. 1. 24. 15:00 수정 2020. 1. 2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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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병원 간호사들 "집에서 근무복 빨아요"
노조합의에도 1년 넘게 세탁업체 미정
병원 측 "시도는 계속했지만 유찰된 것"

[파이낸셜뉴스] #간호사 딸을 둔 A씨는 요즘 마음이 심란하다. 우연히 딸이 차에 놓고 내린 유니폼을 보게 되면서다. 바지에 동전크기 만한 혈흔이 있었는데 병원에서 입는 옷을 집까지 가져와 빨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했다. A씨 딸이 다니는 병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유력 의료기관이지만, 열악한 근무환경과 만성적 인력부족으로 간호사들의 이직이 잦은 상황이다.

#지난해 아이를 출산한 간호사 B씨는 주말이면 친정에 가서 빨래를 돌린다. 세탁하는 옷은 단 한 벌, 병원에서 입는 유니폼이다. 병원에서 유니폼을 세탁해주지 않아 직접 빨아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니폼이 세균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면역에 취약한 아이가 있는 집에 유니폼을 가져갈 수 없었던 B씨는 한동안 세탁소에 빨래를 맡겨왔지만 언젠가부터 세탁소에서도 유니폼을 받지 않자 친정에서 세탁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한국 간호사들은 근무복을 집에서 세탁한다. 작은 병원 얘기가 아니다. 손꼽히는 유력 병원 다수에서 2020년 오늘도 벌어지는 일이다. 피가 튄 근무복을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 가져가 빠는 대형병원 간호사가 한국엔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기자가 간호사 세탁물에 관심을 가진 건 가천대학교 길병원(원장 김양우) 취재를 시작하면서였다. 간호사들이 지하주차장 구석에 있는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제보를 받고 진행한 취재였는데,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취재과정에서 쇄도한 제보 중에선 해부실습실로 쓰던 공간이 탈의실로 변경돼 사용 중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 역시 사실이었다.

한 간호사 근무복에 핏방울이 튀어 있는 모습. 길병원 간호사들은 현재 간호복을 집으로 가져가 개별세탁한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가천대길병원지부 제공.

■우한 폐렴 공포에도 간호사만 ‘벌벌’
기자가 접촉한 다수 길병원 직원들은 놀라운 이야기 하나를 더 들려줬다. 간호사들이 일상적으로 입는 근무복을 직접 집에 가져가 세탁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기자가 입수한 사진에서는 근무복에 피가 튄 모습도 찍혀 있었다. 어떤 간호사는 몇주 동안 근무복을 세탁하지 않고 일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도 했다. 아예 근무복이 한 벌 뿐이라 세탁이 곤란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병원에선 어떠한 관리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이 더는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는 최근까지도 길병원 간호사들은 근무복을 집으로 가져가 빨래한다. 복수의 간호사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답은 마찬가지였다.

감염성 세균 등 오염에 노출되기 쉬운 병원에서 근무복을 집으로 가져가 세탁하는 건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우선 간호사의 가족이 오염에 노출될 수 있다. 어린아이나 노인 등 면역에 취약한 구성원이 있는 가정에선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기자가 취재한 결과 대형병원 인근 세탁소 가운데는 아예 간호복을 받지 않는 곳도 다수 있었다. 세탁소도 받지 않는 간호복을 일반 가정에서 세탁하라고 내몰고 있는 꼴이다.

병원은 어떻게 생각할까. 길병원은 감염예방을 이유로 머리가 앞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헤어스타일도 규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같은 이유로 간호복을 입고 푸드코트나 병원 밖 출입도 자제하도록 했다. 사실상 간호복에 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

감염예방을 위해 머리모양을 고정할 것을 권하는 병원 내 공지문.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가천대길병원지부 제공.

■3차례 입찰에도 유찰... 문제는 ‘돈’
길병원은 2019년 1월 1일부로 모든 근무복 세탁을 개인이 아닌 병원에서 책임지기로 노조와 단체협약을 맺은 상태다. 하지만 1년 넘게 지난 2020년 현재까지도 간호사와 병원 내 각종 직역 근무자들은 근무복을 집으로 가져가 빨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길병원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길병원 관계자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그동안 3차례나 입찰이 있었는데 가격 문제로 업체를 못 구한 것”이라며 “세탁업체들이 너무 영세하다보니 진행이 잘 안 됐다”고 설명했다. 협약이 발효된 이후에도 1년 이상 간호사들이 근무복을 직접 세탁해야 했던 이유는 결국 돈이었다.

일부 간호사들이 세탁하지 않은 근무복을 입고 근무한 사실에 대해서도 “그건 그 간호사가 게을러서 위생관리를 잘 못한 것”이라며 “병원이 그런 것까지 일일이 관심을 가져야 하냐”고 항변했다. 근무복 위생관리는 간호사 개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지난 기사에도 썼듯 지하주차장 구석 엘리베이터 앞 좁은 공간에 응급실 간호사의 탈의실을 마련하고, 돈이 맞지 않아 근무복 세탁업체 선정을 1년 이상 끌고 있는 길병원은 연 매출 전국 8위 규모의 지역 중심 의료기관이다. 연매출은 무려 4500억원이 넘는다.

그렇다면 길병원 간호사만 열악한 상황에 놓인 것일까. 물론 아니다. 지난 기사가 나간 뒤 각지에서 제보가 쇄도했다. 간호사 등 의료인력과 그 가족들의 제보였다. 25일 후속 기사에선 한국 의료계의 간호복 세탁 실태를 정리해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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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취약 지적 없이 임시시설 확인만, '길병원 탈의실' 소방당국 부실 대응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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