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광주교도소는 왜 5·18 암매장지로 지목되나

강현석 기자 2020. 1. 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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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설 연휴 직후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부지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 된 사람들을 찾는 발굴 작업이 다시 시작된다. 옛 광주교도소에서 5·18암매장 추정지에 대한 발굴이 이뤄지는 것은 이번이 5번째. 지난 4번의 발굴에서는 암매장 시신을 찾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시민 암매장 제보가 많은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5·18기념재단은 설 연휴 직후인 28일부터 암매장 시신을 찾기 위한 5차 발굴을 교도소 옛 텃밭(파란 네모 안)에서 진행한다. 5·18기념재단 제공.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5·18 행방불명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5·18당시 가족이 행방불명됐다고 신고한 사람은 242명에 달한다. 그 중 84명만이 5·18관련 행불자로 인정됐다. 시신이 발견된 경우는 2001년 이장과정에서 신원이 확인된 6명 뿐. 78명은 40년 동안 시신도 흔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계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어딘가에 암매장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주교도소는 당시 각종 기록과 계엄군의 증언 등으로 암매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 중 한 곳으로 꼽힌다. 40년 동안 ‘가족 없는 명절’ 을 보내고 있는 5·18행불자 가족들은 발굴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옛 광주교도소 5번째 ‘암매장 발굴’

5·18기념재단은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북쪽 2888㎡에 대해 발굴조사를 진행한다. 이곳은 5·18당시 광주교도소 텃밭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5·18기념재단은 텃밭 인근에 있던 ‘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최근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골이 대거 발견됨에 따라 추가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무연고자 묘지에서는 지난달 이장 도중 교도소 기록에 없는 오래된 유골들이 무더기로 발굴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관련 기관 등이 신원확인과 함께 5·18관련성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2017년 11월 5·18기념재단이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 북측 담장 인근에서 5·18당시 암매장 시신을 찾기위한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5·18기념재단은 “옛 광주교도소에 솔로몬로파크 조성이 예정돼 있는 만큼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돼 더 훼손되기 전에 암매장 의심 지역을 추가로 발굴해 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광주교도소는 2015년 광주 북구 일곡동으로 이전했다.

옛 광주교도소에 대한 암매장 시신 발굴은 이번이 5번째다. 5·18기념재단은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월까지 교도소 북쪽 담장 밑을 시작으로 북동쪽 담장 밖, 남서쪽 주차장 부지, 서쪽 담장 등에 대해 4차례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소득은 없었다.

재단은 10만6000㎡에 이르는 교도소 부지에서 암매장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도소 인근이 40년 동안 지형이 많이 변한 점도 걸림돌이다.

■“교도소에 시신 묻었다” 공수부대원 증언 다수

옛 광주교도소가 암매장 의심지역으로 꼽히는 이유는 이곳에 유독 ‘암매장’과 관련한 계엄군의 증언과 문건이 많기 때문이다. 5·18기념재단이 최근까지 접수받은 암매장 관련 제보 75건 중 10건이 옛 광주교도소 관련 제보다. 당시 교도소 근무자와 재소자 등도 있지만 계엄군도 상당수다.

옛 광주교도소에는 1980년 5월21일부터 5월24일까지 3공수여단이 주둔했다. 당시 3공수는 전남대에서 끌고 온 시민들과 교도소 주변에서 총에 맞아 숨진 시민들을 암매장 했다. 계엄군이 몰래 묻은 시신 11구는 5·18직후 교도소 안팎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1989년 5·18당시 3공수 부대원이 옛 광주교도소에 시민들의 시신을 매장했다고 제보한 내용.

1995년 5·18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지검은 “3공수는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수십명의 연행 시위대를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했는데 일부 공수부대원이 트럭 안에 최루탄을 집어넣고 진압봉으로 가격해 수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3공수 본부대 소속 병장은 “1980년 5월21일 고참병들이 리어커로 시신 9구를 옮겨서 매장했다”고 제보했다. 3공수 11대대 소속 소령은 “16대대에서 교도소 북측 야산 2∼3군데에 매장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3공수 15대대 소속 하사는 “교도소 감시탑 인근에 매장 구덩이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89년 국회 청문회 당시에는 3공수 소속 이었던 이모씨가 “교도소 관사인근 소나무 숲에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묻었다”고 신고하기도 했다. 2017년 9월에는 3공수 부사관이 5·18기념재단에 “5월22일 새벽 시신부패로 5∼7구를 가매장했다”고 제보했다.

■“공동묘지 부근에 매장” 각종 기록

5·18당시 검찰과 계엄군 등의 기록에서도 교도소 내 시신 암매장 기록이 발견된다. 5월22일 광주고검이 검찰총장에게 보고한 ‘시민동향’ 이라는 문건에는 “5월21일 밤 군부대에서 시체 6구를 광주교도소 공동묘지부근에 가매장하였음”이라고 보고했다.

옛 광주교도소 공동묘지 인근에 시민들의 시체가 매장돼 있다는 당시 검찰의 기록.

5월24일 광주지검은 광주교도소에 ‘전언통신문’을 보내 “5월21일 귀소 공동묘지부근에 가매장한 사체에 대하여 발굴 이동시는 군 당국과 협의 하에 필히 당청 검사에게 검시하도록 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을 지휘했던 전남북계엄분소장은 5월30일 광주지검에 ‘전언통신문’을 보내 ‘민간인 사체 처리 지시’를 했다. 이 문건에는 “광주시청으로 하여금 광주교도소에 가매장된 사체 8구를 전대병원으로 운반하라고 지시했으니 검시를 시행하라”고 돼 있다.

1995년 5·18당시 3공수 본부대대 대대장이었던 김모씨가 검찰 조사에서‘시신을 묻었다’며 진술하며 그린 광주교도소 주변 약도.

2017년에는 1995년 검찰 수사 당시 3공수 본부대대 대대장이었던 김모씨가 ‘시신을 묻었다’며 진술하며 그린 광주교도소 주변 약도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는 “5월23일 오후 6시부터 2시간여 걸쳐 12구의 시체를 매장한 사실이 있다”며 암매장 지역 약도를 그렸다. 5·18재단은 이 약도를 바탕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했지만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행방불명자 신청 242명…6명만 시신 찾아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로 인정된 사람은 84명에 이른다. 242명의 행방불명 신고가 있었지만 심사를 통해 공식 인정된 사람만 이 정도 규모다.

시신을 찾은 경우는 딱 한번 있었다. 2001년 광주 북구 망월동 구묘지에 있던 ‘무명열사’의 묘 11기를 인근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전자분석(DNA)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6명 이다. 광주시는 2001년부터 2018년까지 5차례에 걸쳐 5·18 행불자 가족 찾기 사업을 추진해 154가족, 334명 혈액 정보를 확보하고 전남대학교 법의학교실에 보관하고 있다.

5·18직후 시신은 있었지만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무명열사로 묻혔던 이들은 가족들과의 DNA 대조를 통해 신원을 찾았다. 운이 좋은 경우다. 나머지 행불자 78명은 현재까지 시신은 물론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의 관이 옛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돼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광주시와 5·18기념재단 등은 1997년부터 ‘5·18행불자 소재찾기’를 통해 행불자 찾기에 나섰다. 특히 대부분의 행불자가 당시 사망한 뒤 계엄군에 의해 암매장 됐을 것으로 보고 발굴을 시도했다.

제보와 전문가들의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시와 5월 단체는 지난 22년 동안 암매장 의심지역 11곳을 파헤쳤지만 단 1구의 유골도 찾지 못했다. 발굴은 모두 광주지역에서 진행됐다.

그러는 사이 5·18피해자들 사이에서는 “계엄군이 광주 외부로 시민들의 시신을 옮겨 처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범위에는 ‘행방불명자의 규모 및 소재’가 포함돼 있다. 5·18단체와 유가족들은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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