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문화일보

<美國에서 본 한반도>대사 콧수염 공격과 '블랙리스트'

기자 입력 2020.01.29. 14:41 수정 2020.01.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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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신임장 제정을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와 함께한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신기욱 스탠퍼드大 교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미국 내 지일파 육성하는 일본

한국선 美대사 향해 인신공격

대미인식 바꿔야 克日도 가능

이달 중순 미국 언론에는 일본의 대표적 의류업체인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회장이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 일본 인문학 진흥기금으로 2500만 달러(약 290억 원)를 쾌척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한국에선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망해가는 것처럼 여겨지던 바로 그 기업이다. 그런 정서 때문인지 한국 주요 언론에서는 보도되지 않았다.

거의 같은 시각, 한국에선 집권세력을 중심으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때리기에 한창이었다.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이 외교 논란으로까지 번지고, 식민지 조선의 일본 총독에 빗대는 등 인종차별적 공격이 계속되면서 해외 언론에까지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이런 한국과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어떨까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유니클로 기부의 의미를 살펴보자.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싸웠던 일본은 전후 미국 사회에서 지일파를 형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72년에 세워진 외무성 산하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을 필두로 사사카와 평화재단과 같은 민간재단, 그리고 기업들이 일본학 증진과 공공외교에 큰 지원을 했다. 유니클로만 해도 2014년에 이미 UCLA와 와세다(早稻田)대 간의 교류촉진을 위해 250만 달러(29억 원)를 기부했었는데 이번에 그 액수를 무려 10배나 늘린 것이다. 또한, 미국 내 일본학 학자, 전문가,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일왕이나 정부 이름으로 훈장을 수여하기도 한다. 필자가 소장으로 재직하는 연구소 동료이기도 한 대니얼 오키모토 일본학 교수와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주일대사도 미·일 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일왕이 수여하는 욱일장을 받았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일본에 호감을 갖게 되고, 미 대학에 일본학이 뿌리를 단단히 내린 것이나, 정계와 관계에 ‘재팬 핸드’로 불리는 일본통이 포진해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한국도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1991년엔 일본국제교류기금을 벤치마킹한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이 설립됐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통해 해외 한국학 지원 사업을 하고 있으며,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통해 워싱턴에 한미경제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국제교류재단 예산은 일본 교류기금의 5분의 1에 불과하고, 교육부의 감독을 받는 해외 한국학 지원사업은 관료주의적 사고와 관리로 인해 연구자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런 기관들의 책임자는 모두 정권이 바뀌면 교체되는 바람에 업무의 연속성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심지어 사업이 청산되기도 한다.

최근 들어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 일부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는 소문이 워싱턴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이다. A 교수, B 연구원 등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되고 있다. 최근 주미 한국 대사관 고위 관계자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의 해명을 그대로 믿고 싶다. 그러나 꺼림칙한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런 루머가 생겨나 퍼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그 블랙리스트에 들어있는 것 같다는 한 지인은 아마도 대북정책 등에서 문 정부에 비판적인 소리를 내서 그런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일파 사기 진작에 공을 들이는 일본처럼 하지는 못할망정, 한·미 관계 증진에 힘써 온 지한파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아무리 공공외교를 강화한들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특히, 지금처럼 한·미 불협화음이 잦은 때는 학자나 전문가 그룹 등의 비공식 채널을 통해 상호 이해를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시기에 한국에서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외교 수장의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여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집권 세력이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적 발언까지 쏟아내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해리스 대사는 아시아계로선 처음으로 미 해군 제독에 오른 군인으로 한반도 안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 필자가 태평양사령부를 방문해 그를 만났던 2017년 봄은 북한의 잇단 도발,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로 일컬어진 미국의 대북 압박으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 긴장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전문가 대화를 이끌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퇴역 후 호주대사로 내정됐다가 한반도 관할 미군 지휘부에서 쌓은 경험을 높이 평가받아 북핵 문제의 중요성이 커지는 한국에 부임했다. 한국으로선 다행스러운 일이다. 유니클로 기부 소식과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 논란을 대비하며 자문해 본다. 한국인들이 그토록 원하는 극일(克日)이 가능할까? 일본과 분쟁이 발생하면 한국 편을 들어달라는 요청을 미국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 답은 한국인들 스스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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