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상언의 시시각각] 전염병이 다시 드러낸 바닥

이상언 입력 2020.01.30. 00:46 수정 2020.01.30.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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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두려움 느낄 상황이지만
모든 차단 방법이 정당하진 않아
메르스 때의 참담한 장면이 재연
이상언 논설위원

무섭다. 전염병이 도는데,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나. 심리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가 생존·안전이고, 지위나 명예는 그보다 한참 윗단에 있는 고차원적 욕망이라고 한다. 회사 건너편에 있는 삼계탕집 앞에 늘어선 수십 명의 관광객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인데, 그들이 주고받는 중국어가 귀에 또렷이 꽂힌다. 회사에서는 누군가의 코 훌쩍이는 소리, 기침·재채기에 신경이 쓰인다. 욕구 계단 바닥에 깔린 본능의 발동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두려울 것이다. 내가 아프거나 죽는 것, 주변 사람에게 병을 옮기는 것 모두 괴로운 일이다. 인간은 이런 공포심에 의해 위험을 피하도록 설계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 요소를 없애는 모든 방법이 정당하지는 않다. 흑사병 환자가 생긴 집이나 마을 사람을 몽땅 불태우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정부가 중국 우한에 고립된 국민을 전세기로 귀국시키기로 하자 왜 위험한 사람들을 데려오느냐는 아우성이 터졌다. 정부는 귀국 뒤 2주 동안 천안의 국가시설에 격리해 감염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천안에서 왜 하필 우리 쪽으로 보내느냐는 원성이 쏟아졌고, 아산·진천의 시설로 방향을 틀었다. 총선(천안에는 지역구가 3개)과 천안시장 보궐선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아산·진천 주민들이 ‘결사 반대’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젠 어떻게 할 것인가.

우한에서 오는 국민은 죄인이 아니다. 전염병 보균자라는 확증도 없다. 우한은 내 가족과 친지가 일하러, 공부하러 갔을 수도 있는 곳이다. 이미 몇몇 나라가 자국민을 우한에서 단체로 데려갔는데,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았다. ‘무조건 집단 격리’도 아니었다.

중국인 태우기를 거부하는 택시, 중국인 출입을 금한 식당도 등장했다. 도대체 중국인을 어떻게 걸러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영어를 쓰면 중국에서 왔는지, 대만이나 싱가포르에서 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권을 보자고 할 텐가. 위험을 피하려는 것은 개인의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우기지 말라. 그렇다면 의사와 간호사가 감기 증세를 보이는 모든 환자에 대한 진료를 거부해도 된다는 논리가 된다. 직업적 책임이 있다. 의료인은 병 치료를 해야 하고, 택시 기사는 승객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줘야 한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송강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광주까지 간 것은 단순히 돈 10만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달 라이더 노동조합 회원들은 중국인 밀집 지역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위험수당’을 배달 조건으로 제시했다. 수시간 뒤 입장을 번복하기는 했지만, 씁쓸하다. 그들이 배달 주문자와 접촉할 때는 포장된 음식을 장갑 낀 손으로 전달하는 순간뿐이다. 이게 수당을 따로 받아야 할 정도의 위험이라면 서울 도심의 편의점·백화점·식당 종업원은 ‘생명수당’을 받아야 마땅하다.

5년 전 메르스 사태 때 서울시장이 심야 생중계 회견으로 삼성병원 의사가 병세가 있음을 알고도 돌아다녀 1500명 이상을 접촉했다고 발표했다. 그 의사가 메르스 감염을 알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1500명도 과장된 수치였다.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높였던 시장은 훗날 의사들의 집단 항의를 받고 사과했다.

다들 가물가물하겠지만, 메르스 환자 치료에 전념한 의사의 자녀가 ‘등교를 거부당한’ 일도 있었다. 학부모들이 그 의사의 자녀가 메르스에 걸렸을지 모른다며 학교에 오지 못하게 하라고 학교장에게 요구했다. 우리 사회가 그때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 역할을 맡은 배우(이병헌)가 외쳤다. “사람은 인격이라는 게 있고, 국가는 국격이라는 게 있어.” 화자(話者)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을 갖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국격, 인격의 바닥을 어디까지 보게 될까. 전염병보다야 덜하지만, 그것도 두렵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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