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중앙일보

[르포] "노인도 많이사는 동넨데.." 격리시설 반대 진천의 호소

신진호 입력 2020.01.30. 05:02 수정 2020.01.30. 15:4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충북 진천·충남 아산 주민 "정부 방침 반대"
트랙터·트럭으로 도로 막고 교민 수용 저지
충북도 "진천 수용 재고해라" 공개적 반발
충남 "정부 결정 수용, 도민들 이해해달라"

지난 29일 오후 4시 충북 진천군 덕산면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입구. ‘천안 시민은 자국민이고, 진천군민은 타국민이냐’ ‘우한 교민 수용 반대’ 등 현수막이 길가에 걸렸다. 마스크를 쓴 주민 100여 명이 도로를 에워싼 뒤 트랙터·트럭·승용차로 왕복 4차선 도로를 완전히 막았다.

29일 오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충북혁신도시 내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입구에서 주민들이 트랙터를 이용해 도로를 막고 있다. 최종권 기자


정부는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발원지인 중국 우한에서 입국하는 교민을 충남 아산과 충북 진천의 공무원 교육시설에 나눠 격리한다고 발표했다. 격리 장소는 진천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과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등 2곳이다. 진천과 아산에서 만난 주민들은 “우리를 만만하게 봐서 이런 결정이 났다. 결정을 번복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진천의 격리시설은 충북혁신도시에 있다. 이곳엔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등 11개 공공기관이 이주했다. 2014년부터 아파트 단지 12곳(1만952세대)이 입주를 마쳤다. 충북혁신도시 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2만5937명이다. 공무원 인재개발원 입구에서 약 500m 거리에는 2100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 2개가 있다. 반경 1㎞ 내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도 있다.

중국 우한 교민들이 진천에 수용된다는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불만을 쏟아냈다. 또 혁신도시에 긴급 상황을 대비할 만한 대형병원이 없는 데다 인구 밀도가 높다는 점을 우려했다. 특히 유아와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의 걱정이 가장 컸다.

김윤희(45)씨는 “충북 혁신도시는 인구 밀도가 높고, 공립유치원(3곳)과 초등학교(3곳), 중학교(2곳), 고등학교 등 수백명의 학생들이 거주하고 있어 격리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며 “내일 당장 경기도의 친척 집으로 아이 3명을 보낼 생각인데 모시고 있는 80대 노모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29일 오후 우한 교민들이 수용될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앞에 경찰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정부는 이날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경찰인재개발원'과 충북 진천군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2곳에 우한에서 귀국을 희망하는 한국인 720명을 분산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뉴스1]


인은선(39)씨는 “정부가 주민들과 상의해 미리 얘기라도 해줬으면 마스크와 세정제, 생활용품을 구했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다”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지역에 격리 시설을 두는 건 옳지 않다”고 토로했다.

혁신도시 인근에 사는 주민 엄모(66)씨는 “중국 우한에 고립된 우리 국민도 보호받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에는 동감을 한다”면서도 “정부가 수용 장소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변 상황을 더 세심하게 고려했어야 한다. 타 지역에 외진 시설도 많은데 하필 젊은 부부가 많이 사는 혁신도시를 택했는지 의아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교민들을 격리 수용할 시설 중 하나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을 결정한 데 대해 충북도가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정부 방침에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혁신도시를 두고 맞닿은 진천군·음성군을 비롯해 충북지역 정치권도 일제히 반발했다.

김장회 충북도 행정부지사는 29일 기자회견을 갖고 “우한 교민의 임시 생활시설을 충남 천안으로 결정했다가 천안시민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진천으로 변경한 것은 심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인재개발원은 충북 혁신도시 한복판에 있고 9개 초·중·고교가 밀집한 지역으로 전염병의 주민 전파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임시 생활시설로 부적합하다고 생각되므로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충북 진천군 이장단협의회와 주민들이 29일 오후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앞을 트랙터 등으로 봉쇄하고 우한 교민 수용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송기섭 진천군수도 “송환 대상자 수용시설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결정한 것은 입지특성을 고려했을 때 불합리한 결정으로 정부는 신중히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날 오후 5시 충남 아산시 초사동 경찰인재개발원으로 들어가는 왕복 4차선 도로도 트랙터와 트럭, 지게차 등으로 가로막혀 진·출입이 불가능했다. 우한에서 송환된 국민을 아산에 격리 수용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며 오후 1시쯤부터 인근 마을 주민들이 갖다 놓은 장비들이다. 경찰이 트랙터와 트럭을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지만, 주민들은 “우리도 살아야 할 게 아녀~”라며 아예 오가는 차량을 막기도 했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은 도로 가운데 화단에 주저앉아 “이게 뭐 하는 거야. 이래도 되는 겨?” “다 죽게 생겼는데 들여보내 주게 생겼슈”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마침 차를 몰고 경찰인재발원으로 들어가려던 남성은 트랙터에 막힌 도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주변에 차를 주차한 뒤 일행들과 걸어서 들어갔다.

주민들은 “동네 사람들이 뭔 죄여, 정부가 방침을 철회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밤샘 농성을 하기 위해 천막을 치고 간이의자도 수백 개를 준비했다. 한 70대 할머니는 “그 양반들이 내일 들어온다는데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여”라며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또 다른 주민은 “우리 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걱정이 돼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고 했다.

29일 오후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정문 앞에서 농기계로 도로를 막은 주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날 정부는 아산과 충북 진천 공무원 교육시설에 우한 교민을 격리수용 한다는 발표했다. [연합뉴스]


김재호 온양5통장은 “자치단체, 주민과는 아무런 의견 조율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천안에서 반대한다고 아산을 격리 수용시설로 결정한 것은 주민을 무시하는 처사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충남도는 정부 결정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양승조 충남지사는 이날 오후 5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결정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닌 국가가 내려야 할 조치라고 생각한다”며 “국가의 재난 앞에 희생을 감수할 아산시민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지방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게 충남도의 생각”이라며 “도민의 우려와 염려가 크지만, 정부와 방역 당국을 믿고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

아산·진천=신진호·최종권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포토&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