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정의 시선] 노무현은 왜 사스 위기 때 중국 방문 강행했나
중국통 김하중 대사의 고언 듣고
사스 위기를 국익 극대화 기회로
문재인 정부 대중 외교 전략 실종
장하성 등 비전문가 인사가 문제
"지금 중국에서 사스(SARS)가 한창이지요?"(노무현 대통령)
"네, 한창입니다."(김하중 주중대사)
"그럼 저는 언제 중국에 가야 되는 겁니까?"
"(사스 때문에 연기된 상황이지만) 당초 예정대로 7월 초에 오십시오."
"7월 초요? 오늘이 5월 26일인데 어떻게 7월 초에 중국에 가지요?"
"대통령님, 사스는 6월 말이면 진정이 될 겁니다."
"사스가 6월 말이면 진정될 것이라고 대사가 어떻게 알지요?"
"대통령님, 저는 중국에 주재하는 대사이고 중국 전문가입니다. 현지 대사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지요."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가 최근 출간한 '오럴 히스토리(Oral History) 총서'『한국 외교와 외교관』의 김하중 전 주중대사 편(하권 206쪽)에서 처음 공개된 사스 때 일화다. 당시 공관장 회의 참석차 일시 귀국한 김 대사는 그해 5월 26일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별도로 만났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 면담에 앞서 김 대사에게 "사스가 한창이니 대통령의 방중 문제는 보고하지 말라"고 사전에 단속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방중 이슈를 불쑥 꺼내자 김 대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7월 초 방중론'을 강하게 진언했다. 대사직을 건 행동이었다.
당시 김 대사는 "중국의 사스 진행 상황, 인민 앞에서 눈물 흘리며 사스 극복을 다짐한 원자바오 총리의 진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사스 조기 극복을 확신했다"고 한다. 당시 후진타오 정부 출범 첫해에 대통령의 조기 방중을 성사시켜 사스 위기를 한·중 관계 강화 기회로 만들자는 전략적 국익 계산도 했다.
결국 노 대통령은 측근보다는 '중국통' 전문가인 김 대사의 말을 믿고 방중(7월 7일부터 3박 4일)을 결심하고 6월 4일 주중대사관에 지침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청와대와 외교부는 반신반의했는데 김 대사의 예견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극적인 상황이 곧 벌어진다. 6월 24일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베이징 여행 제한이 해제됐고, 7월 5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사스가 완전히 통제됐다고 선포했다. 노 대통령의 방중 불과 이틀 전이었다.
사스 사태 와중에 노 대통령이 방중을 결단하고 외국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중국 땅을 밟자 중국 측은 대대적으로 환대했다. 이를 계기로 한·중 관계는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고,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어 황금기를 이어갔다.
'최장수 주중대사(2001년 10월~2008년 3월)' 기록을 세운 김 전 대사는 "사스를 통해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은 한국이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히 알게 됐다. 사스 위기는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대사의 일화를 자세히 소개한 이유가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와중에 문재인 정부와 외교부 및 주중 한국대사관이 보여준 위기 대응이 17년 전보다 너무도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
1월 23일 장하성 주중대사 주재로 열린 특파원 간담회에서 "사스 때는 어떻게 대응했느냐"는 질문에 "2003년 때 일이라 잘 모른다"는 답변이 서슴없이 나왔다니 황당할 뿐이다.
우한(武漢)에 전세기를 띄우는 과정에서 드러난 우왕좌왕 외교가 특히 실망스러웠다. 주중대사를 지낸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하성 주중대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친중 정부'라지만 잦은 인사 교체로 고위직에 진짜 중국 전문가가 드물다 보니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살릴 전략도 안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중국 현지의 긴박한 상황 변화를 신속히 파악하고 국내와 연계해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월 20일 중국공산당과 정부에 총력 대응을 지시했고, 같은 날 한국에서도 우한 폐렴 첫 확진자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21일 신규 임용된 공무원들을 만나 한가하게 '워라밸'을 강조했다.
시 주석은 춘제(春節·중국 설) 당일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해 '전염병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다음날 문 대통령은 정부를 믿고 과도한 불안감을 갖지 말라더니 이틀 만에 "과하다 할 정도로 대응하라"는 오락가락 메시지를 냈다.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는 바이러스가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실상을 드러내 줬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김재규는 "도대체 혁명은 왜 한 거냐"고 박정희에게 따져 묻는다. "소위 촛불 혁명은 왜 했느냐"고 전염병이 창궐한 지금 묻고 싶다. 적폐로 낙인찍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나. 권력이 우선이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이 뒷전이라면 혁명의 대의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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