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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사법부 내 '문화혁명'

양은경 사회부 법조전문기자 입력 2020. 02. 06.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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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경 사회부 법조전문기자

2017년 3월 25일, 연세대학교 국제회의장. 토요일인데도 한 학술대회 취재를 위해 기자들이 몰렸다.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한 학회의 판사 대상 설문 조사와 학술대회 개최를 막으려 했고 이에 저항한 판사가 사표를 내려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 행사는 마치 사법 파동의 시발점처럼 다뤄졌다.

설문 조사 내용은 "법관 독립을 위해 사법행정을 바꿔야 한다는 응답자가 96%"란 것이었다. 발제문에선 "사법행정엔 당사자인 법관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 "법원행정처 관료 출신 위주의 대법관 구성이 다양화돼야 한다" "법원장 호선제(互選制)를 도입해야 한다" 등의 제안이 쏟아졌다. 기존 행정처는 법관 독립을 가로막는 관료주의 집합체이자 문제 제기마저 못 하게 하는 적폐 집단이었던 셈이다.

해당 학회는 지금은 법원의 주류가 된 진보적 판사들의 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다. 인사말을 한 김명수 당시 춘천지법원장은 대법원장, 모임 간사인 김형연 부장판사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거쳐 법제처장, 발제자인 김영훈 서울고법 판사는 인사실무 총책임자인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이 됐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탄희 전 판사는 4월 총선에 출사표를 냈다.

제안도 대부분 실현됐다. 행정처가 아닌 판사들로 구성된 '사무분담위'가 재판 사무를 정한다. 이 정부 들어 교체된 대법관 9명 중 5명은 진보 성향이다. 전국 4개 법원에서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실행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민주화'된 법원을 엘리트 판사들이 속속 떠난다는 점이다. 지난달 말 기준 사직자 28명 중 대법원 재판연구관 또는 법원행정처를 거친 판사가 16명으로 50%가 넘는다. 예년엔 30% 선이었다. 법원 내 편 가르기와 반(反)엘리트주의 때문이다. 행정처 출신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따돌림과 불이익, 인기영합적인 사법 정책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가 묵살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법리에 밝기로 유명한 한 판사는 "무엇 때문에 버티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부산지법 김태규 부장판사는 "건국 이후 최악의 사법 파동"이라고 했다. 과거 사법 파동과는 달리 법원 수뇌부의 지지를 받으며 상대편을 척결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법원이 스스로를 '자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조사와 수사의 명분이었던 '재판 거래'는 실체를 찾기도 어렵다.

당연히 그 피해는 법원 조직만 받는 게 아니다. 접수일로부터 2년 6개월이 넘게 법원에 적체된 '장기 미제 사건'이 1년 새 44%가 늘었다. 변호사들은 "질 것 같은 사건이 이기고, 이길 것 같은 사건이 진다"고들 한다. 중요 사건에 대한 '코드 배당' '코드 재판'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

2017년 봄, 몇몇 판사가 꿈꾸던 법원이 이런 모습이었다면 이 사건은 최악의 사법 파동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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