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100만원 사기치려..설 명절에 보육원 36명 울린 40대

김준희 입력 2020.02.06. 05:01 수정 2020.02.0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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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모 보육원 후원자들 속앓이
설 나들이 지원 약속한 40대 잠적
'대기업 통신사 직원'이라고 사칭
"노트북 싸게 판다" 100만원 '꿀꺽'
십시일반 보태 나들이는 마쳐
추가 사기 정황..검찰에 고소 예정
아동 일러스트. [중앙포토]

전북 전주의 한 보육원을 후원하는 단체 회원들은 최근 속앓이를 해야 했다. 설 명절을 앞두고 보육원 아이들의 나들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버스와 식사·선물 등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40대 남성이 갑자기 잠적해서다.

본인을 대기업 통신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이 남성은 '노트북을 직원가에 판다'고 속이고 후원금 100만원도 입금받아 가로챈 것으로 드러났다. 후원자들은 올해 대학생이 되는 보육원생에게 노트북을 입학 선물로 주려다가 낭패를 봤다.

5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전주 모 보육원을 후원하는 단체 회원들은 매년 추석과 설 명절마다 보육원생들과 나들이를 간다. 보육원생 대부분이 가족이 없어 집에 가지 못해서다. 후원자들은 "보육원생들에게 명절 전날은 가장 슬프다"며 올해도 설 전날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초·중·고교 학생 36명과 함께 나들이를 갈 계획을 세웠다. 올해가 6년째 되는 해다.

2015년부터 보육원을 후원해 온 A씨(49)는 지난달 1일 한 등산 모임에서 만난 B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A씨가 다른 일행과 보육원생 설 나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자 옆에 있던 B씨가 "회사 사회공헌팀에 건의해 나들이에 필요한 것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40대 중반으로 알려진 B씨는 A씨가 지난해 추석 때 등산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된 인물이다. 이미 네다섯 번 등산을 같이한 데다 인상도 좋고 회비도 빠뜨린 적 없어 B씨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A씨는 전했다.

A씨는 나들이 준비를 위해 B씨와 e메일을 20여 통 주고받았다. B씨는 적극적이었다. B씨는 지난달 14일 A씨에게 보낸 메일에서 "(보육원생 중) 고등학생이 7명 포함돼 있던데 그 친구들한테 인강용(인터넷 강의용) 태블릿 PC를 지원해 주고 싶은데 괜찮냐"고 먼저 제안했다. 그러면서 "참고로 제가 후원하는 보육원에는 대학에 가고자 하는 일부 학생에게 지원해 줬다"고 덧붙였다.

A씨가 메일을 통해 "태블릿 PC 기증 소식에 보육원생들이 좋아한다"고 하자 B씨는 지난달 17일 "작년에 개인적으로 기부를 많이 못 해서 좀 찜찜했는데 다행이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B씨는 최종적으로 "나들이 당일 오전 9시 30분~오후 9시 30분 28인승 리무진 버스 2대, 1인당 4만원짜리 저녁 식사, 회사에서 준비한 선물 세트, 태블릿 PC 7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B씨가 주도적으로 나선 탓에 A씨 등 후원자들은 기존에 가려던 식당 예약을 취소하고, 전주에 있는 고급 뷔페식당을 예약했다. 보육원생들도 나들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B씨가 처음부터 '퍼주기'식 제안만 한 건 아니었다. 지난달 3일에는 "회사 직원가로 노트북을 구입할 수 있는데 생각 있으면 신청해 주겠다"고 했다. A씨는 노트북 1대를 신청했다. 올해 대학에 가는 보육원생 한 명에게 입학 선물로 주기 위해서다.

A씨는 "B씨가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수백만원을 지원하는데 노트북을 안 사기가 미안했다"고 말했다. A씨는 후원자들의 동의를 얻어 지난달 13일 후원금 계좌에서 100만원을 B씨 계좌로 송금했다.

검찰 로고. [연합뉴스]

이 무렵부터 B씨는 수시로 말을 바꿨다. "국제 박람회 때문에 외국에 나가야 한다" "사장단 일정 때문에 귀국 일정이 늦어졌다"고 했다. B씨가 "보안 관련 업무를 하기 때문에 휴대전화는 안 쓴다"고 해 e메일이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다. 급기야 지난달 22일에는 연락이 안 닿더니 23일 회사 사회공헌팀과 함께 보육원 실사를 온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A씨는 나들이 전날 부랴부랴 후원자 일부와 지인들에게 이런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A씨와 친분이 있던 한 버스회사 측에서 45인승 버스를 무상으로 대고, 모자란 비용은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보육원생들은 설 연휴 첫날인 지난달 24일 후원자들과 함께 전주 한 문화 시설과 키즈 카페, 극장 등을 둘러보며 나들이를 즐겼다. 점심은 중국집, 저녁은 고깃집에서 먹었다. 문화 시설 관장과 후원자들이 식사비를 댔다.

A씨는 "보육원 아이들과 후원자들이 고기를 함께 구워 먹으며 명절 기분을 냈지만, 당초 뷔페를 먹는다고 좋아했다가 고깃집으로 장소가 바뀌어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후원자들은 아직까지 보육원생들에게는 B씨에게 사기당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 행여나 상처를 받을까 걱정해서다. A씨는 "금년엔 (B씨 덕분에) 좀더 풍성한 나들이가 될 거라는 부푼 기대가 있었다"며 "사기 칠 사람이 따로 있지 보육원 아이들을 실컷 설레게 해 놓고 속여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

B씨는 해당 대기업 직원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인터넷에서 B씨 실명을 검색하면 그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글이 다수 나온다고 한다. 후원자들은 B씨가 대기업 직원을 사칭해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환심을 산 뒤 물건을 시가보다 싸게 팔 것처럼 속이고 돈을 가로채는 수법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B씨를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할 예정이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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