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구멍 뚫린 항만방역.. '발열·기침' 無통보 선박 거짓말 정황

김성호 2020. 2. 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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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대리점, "통신장비 고장으로 통보 못해"
검역당국, 업체 변명 그대로 반복.. 검증 없어
거짓말 가능성 높아.. "일부 고장나도 교신 가능"

[파이낸셜뉴스] 발열과 기침 증상을 보인 선원이 다수 있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입항한 선박이 확인돼 논란이 된 가운데, 관계당국이 이를 묵인한 정황이 드러났다. 해당 선박과 대리점이 허술한 변명으로 일관했음에도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검역당국은 기자에게 업체 측 변명을 그대로 전달하기까지 했다.

발열과 기침 환자 3명을 태운 채 5일 오전 광양항에 입항한 싱가포르 국적 아스팔트 운반선 BITUMEN EIKO호. 해당 선박은 통신장비 고장을 이유로 보고 없이 광양항에 접안했다. 사진은 해당 선박이 항해하는 모습. 출처=fnDB

■검역당국·선박 대리점, "통신장비 고장으로 못알려"
8일 질병관리본부 여수검역소에 따르면 지난 5일 오전 광양항에 입항한 아스팔트 운반선 BITUMEN EIKO호가 선내 발열과 기침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3명 있음에도 이를 사전에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선박은 지난달 말 중국 닝보와 필리핀 바탄에 입항했으며, 질본은 현재 이곳 모두를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유행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선박 접안 후 승선한 선박대리점 남해해상 직원으로부터 신고를 접수한 여수검역소 측은 현장에 출동했으며, 해당 환자들이 의사환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입항 전 승선한 도선사는 이러한 사실을 사전에 고지 받지 못한 채 하선 후 집으로 간 것으로 파악됐다.

충격적인 점은 BITUMEN EIKO호가 도선사를 태우고 접안까지 하는 동안 당국이 제지는 물론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만약 증상을 보인 선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보균자였다면 일선 항만에서 그대로 방역망이 뚫렸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여수검역소 측은 “배가 입항하며 통신장비가 고장이 나 있었다”며 “그래서 (선박이) 대리점에 (유증상자가 있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고, 우리도 인지를 정확히 할 수 없었다”고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도선사와 대리점 관계자가 먼저 배에 승선한 것에 대해서도 “법을 보면 도선사가 검역 전 탑승하도록 돼 있다”며 “배가 (유증상자) 격리조치를 잘 해줘서 증상자와 도선사, 해운대리점 사이에 접촉이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법과 매뉴얼에 따라 조치한 것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주장이다.

국내에서 해당 선박 사무를 처리하는 대리점 관계자 역시 “배가 위성통신 장비가 고장이 나서 항내에 들어와 모바일폰 신호를 잡지 않고서는 어떤 통신도 불가능했다”며 “(모든 통신장비가) 위성장비기 때문에 항내로 들어오지 않으면 연락이 안 된다”고 말했다.

검역당국과 업체 모두 선박 통신장비 고장으로 발열 및 기침환자를 태운 배가 보고 없이 입항하는 걸 차단할 수 없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BITUMEN EIKO호는 VHF-DSC 통신장비를 두 대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고장을 이유로 유증상자 발생을 통보하지 않았다. 해당 선박엔 VHF 외에도 쌍방향 VHF와 MF, HF 및 위성을 이용한 각종 통신설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제공=수협중앙회

■"통신장비 고장이면 도선사는 어떻게 태웠나"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짓이다.

선박 통신장비는 비상용을 제외하곤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주파수를 통해 주변 선박 및 항만당국과 교신하는 VHF Radio 등의 장비, 위성을 이용한 전화·팩스·텔렉스·이메일 등의 장비다.

이는 UN 산하의 국제해사기구(IMO)가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위해 맺은 협약에 따른 것으로, 해상조난안전시스템(GMDSS)이란 체계 아래서 구체화돼 있다. 1999년 이후 전 세계 모든 국적선이 따르고 있는 이 체계는, 국제항해에 종사하는 모든 여객선과 총톤수 300톤 이상의 모든 선박에 적용돼 무리없이 지켜지고 있다.

BITUMEN EIKO는 한국과 중국, 필리핀 등을 오가는 선박으로 총톤수가 4200톤이 넘는다. 즉 법정 장비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이 배가 갖추고 있는 주요 통신장비로는 VHF 2대와 MF/HF 각 1대, 위성을 이용한 전화와 이메일 설비 등이 있다. 해난사고를 대비해 만들어졌기에 서로 다른 주파수와 안테나, 위성을 이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검역당국과 선박, 대리점 등이 주장하는 대로 통신장비가 망가져서 발열과 기침 증상자를 보고할 수 없었다는 건 이 모든 장비가 개별적으로 고장이 났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운업계 다수 관계자들에게 이 같은 내용을 전하자 하나같이 황당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배의 모든 통신장비가 망가졌다면 선박교통관제나 도선사와의 교신도 불가능해 아예 입항할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

한 항해사는 “낚싯배도 아니고 규모 있는 선박인데 VHF가 하나도 아니고 둘 모두 고장 났다는 게 말이 되는 변명이냐”며 “도선사는 태웠다는데 그럼 소리라도 쳐서 불렀다는 건가”하고 비판했다.

또 다른 항해사는 “광양항이라면 들어가면서 핸드폰도 터졌을 건데 왜 알리지 않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며 “도선사가 탑승했을 때도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내려서 집으로 간 것 아니겠나”하고 말했다.

국립여수검역소 전경

■허술한 선박 변명, 무능한 검역당국
실제로 검역당국과 선박 측 해명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통상 입항선박은 VHF와 2-Way VHF 등을 통해 도선사 및 예인선과 연락을 취하는데, 이 장비들이 모두 망가졌다고 주장하면서도 도선사가 어떻게 탑승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배의 모든 통신장비가 위성장비란 것이나, 선내 모든 통신장비가 전부 망가졌다는 주장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전화가 터지는 해역에서 유증상자 발생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도 이해되지 않는다.

10년 경력의 한 항해사는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VHF가 주파수로 교신하는 장비라는 걸 다 알 것”이라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항해사는 “VHF 교신 내역은 다 녹음되는데 조사하면 다 나올 걸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며 “장비 제대로 관리 안 하면 과태료를 먹일 수 있도록 돼 있는데, 확인해서 과태료를 부과했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해당 선박은 지난달 23일 중국 닝보를 거쳐 28일 필리핀 바탄에 입항한 뒤 광양으로 들어왔다. 검역당국이 직전 출항 항구가 중국인 선박에 대해서만 승선검역을 하고 있었기에 입항 후 검역대상으로 분류됐다.

여수광양항만공사는 지난달 28일부터 여수검역소와 협조체계를 구축하고 항내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들은 중국에서 출항한 입항선박에 대해 육지로부터 최대 9km까지 떨어진 해상에서 승선해 검역을 진행하고 있다. 승선검역에서 발열환자 등이 파악될 경우 해당 선박은 항내로 들어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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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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