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 논설위원이 간다] 선거부정 의혹에 직면한 대통령의 시간

박재현 2020. 2. 10.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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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대통령' 표현의 숨은 뜻 찾아야
정권 침묵이 광장의 분노 부를 수도
향후 총선 과정서 정치쟁점화 불가피
대통령 비서들 선거개입은 국정농단


울산사건 공소장에 나타난 의문점들

문재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신분으로 있을 때인 2014년 7월 울산 남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한 무소속 송철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소장에 대통령이 35번이나 언급된 것은 뭘 의미하겠나”.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과 관련해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13명의 공소장을 읽어 본 검찰 고위간부 출신의 말이다. 그는 통상의 경우 공소장에는 수사 대상이 아닌 인물에 대한 적시를 극도로 자제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할 때도 ‘공소 외’라는 수식어를 통해 당사자의 명예 등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이 법상식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현직 대통령에 대해선 언급 자체를 꺼리는게 지금까지의 관례였다는 주장이다. 과거 권력형 비리사건이나 대통령 친인척 등의 사기 사건 등에도 대통령이란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13명의 기소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한 한 차례 소환 조사는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본격적 수사를 위한 워밍업이다. 야당의 주장처럼 이제부턴 ‘대통령의 시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정권의 침묵은 광장의 아우성으로, 여권의 어설픈 변명은 민심의 분노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얘기다.

4·15 총선 전 까지 울산사건은 물론 이 정권 핵심 실세들에 대한 재판이 올스톱 됐다고 정의의 왜곡과 권한 남용을 둘러싼 정치적·사법적 논란이 멈춘 것은 아니다. 검찰은 소환 조사 등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만 잠시 보류한 것일 뿐 서류와 각종 증거들을 통한 수사는 계속하고 있다. 어찌보면 수사의 시간을 더 벌게 된 셈이다.

공소장에 나타난 이번 사건의 의문점은 무엇일까.(※직함은 당시 기준)

1 황운하를 누가 움직였을까

2017년 9월 중순 문재인 대통령의 30년 지기인 송철호 후보자가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먼저 받은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 없었다는 증거다. 송 후보자가 한달 전 구성된 선거캠프인 ‘공업탑 기획위원회’ 위원들에게 “황운하가 인사를 온다는데 만나볼까”라고 묻고, 캠프의 한 직원이 “만나보소. 송병기가 모아놓은 김기현 울산시장 비위자료를 줘 보이소”라고 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황 청장은 20일 저녁 모임 이후 수사 경찰 들을 채근하고 ‘수사 의지 부족’을 이유로 경찰관들을 인사조치하는 등 직권을 남용했다. 황 청장이 지방선거일 이전까지 청와대 민정비서관실과 반부패비서관실, 국정기획상황실 등에 18차례나 제출한 보고서가 어떻게 취합됐고 어떤 형태로 정리돼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 지도 의문이다.

2 송철호가 출마를 결심한 배경은

그는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포함해 모두 8차례에 걸쳐 총선과 지방선거 등에서 낙선했다. 울산 출신이 아닌데다 수 차례 당적을 바꿔가며 출마해 민주당의 경쟁 후보들에 비해 입지가 취약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노무현 정부 때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낸 것 외에는 공직 경험이 거의 없고 지역내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당내 경선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가 황운하 청장이 임명된 직후인 2017년 8월 울산시청 공무원들을 영입해 선거캠프를 차리게 된 과정에 ‘보이지 않은 권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송 후보자의 한 언론 인터뷰를 보자. “선거에 나가기만 하면 떨어져 다시는 선거판에 얼씬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몰래 이사를 했다. 이후 문재인 당 대표를 만났더니 ‘형 이사 했다며? 다시 이사 가소’라고 하더라.” 그는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무서운 분들한테 딱 트랩에 걸려 있었다. 운명적으로 참 희한하게 걸렸다”고 했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송철호 후보자의 손을 잡고 당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3 박형철이 사법처리를 감수한 이유는

공소장을 보면 백원우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이광철 선임 행정관, 문해주 행정관, 박형철 반부패비서관 등은 자신들의 행위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를 쓰고 송 후보자 당선에 매달린 것은 법 보다 무서운 정치권력을 의식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먼저 문 행정관은 검찰 수사관 출신으로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고교 동문이기도 하다. 지방 검찰청에 있던 그는 2000년대 초 서울로 올라와 대검에서 범죄정보를 다루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했다. 그런 그가 송 후보자의 진정서 등을 과장해 범죄첩보보고서 등의 형태로 작성하고 이를 상급자에게 보고한 경위가 석연찮다.

박형철 비서관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부 때 윤석열 검사와 함께 국정원 댓글사건을 수사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선거부정 행위에 대해 해박한 법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백 비서관의 정치적 입지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지만 이미 그 윗선의 힘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번민과 고통 속에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던 그가 향후 재판에서 어떤 진술을 할지가 관심거리다. 그에게 검찰은 인생이고 숙명이었다.

4 한병도가 자리를 제의한 배경은

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2017년 6월 임종석 비서실장과 임동호 민주당 최고위원은 마장동의 한 식당서 열린 ‘86학번 모임’에서 만났다. 임 위원은 임 실장에게 “최고위원이 끝나면 오사카 총영사 자리로 갔으면 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후 그는 울산시장의 후보로 뛰었고, 송 후보측에선 “공기업 사장이나 차관 자리를 줄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이 와중에 한병도 정무수석은 오사카 대신 고베 총영사 자리를 제의한 뒤 인사비서관실 직원을 통해서는 공기업 사장 자리를 제시한다. 왜 이들이 민주당 경선 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송 후보자를 단독 공천될 수 있도록 뛰었는 지 의구심이 생긴다.

문 대통령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정무수석의 영향력이 인사비서관실까지 쉽게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심심찮게 경험해 오지 않았나.

5 현직 대통령을 언급한 이유는

2017년 10월 11일 송 후보자는 삼청동 식당에서 청와대 균형발전비서관실 직원을 만난 뒤 청와대를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대통령은 외부 행사를 마친 뒤 국회 동북아평화협력 위원과의 간담회 외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청와대까지 가서 “나의 소원은 송 후보자의 당선”이라고 했던 문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을까.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까.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공소장 첫 구절에 선거에 있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설명하면서 ‘대통령’ 또는 ‘현직 대통령’이란 표기를 쓴 것은 어떤 의미일까.

13명에 대한 범죄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피고인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압박을 위한 전략적 조치였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문 대통령의 간여 의혹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감추려 했던 공소장이 언론 보도로 공개되면서 이 사건은 선거과정에서 최대의 이슈가 될 전망이다. 여당은 신종 코로나 확산 등 현안 해결을 위해 2월 임시국회를 요구하며 선거부정이 정치쟁점화되는 것을 막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권력 최상부인 청와대의 8개 부서가 개입하고, 관련자들이 기소됐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집권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문 대통령도 수사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검찰 발언만 강조하며 대통령의 시간을 제외하려는 것은 국민을 무시한 처사일 것이다. 이번 사건과 대통령이 전혀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통령 비서들의 선거부정이야말로 전형적인 국정농단이 아닌가.

박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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