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추미애 법무장관을 위한 변론

한상훈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박사 2020. 2. 1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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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오래된 습관과 같이 오랜 관행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한 관행이 설령 잘못된 것이어도 그렇다. 추미애 법무장관이 야당 국회의원이 요청한 공소장 전문을 제출하길 거부하고 공판 개시 이후에 공개하겠다고 밝히자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형사재판에서의 정당한 방어권, 명예, 인격권을 고려하면 공판절차의 개시 이전에 공소장의 전문을 무조건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임에 동의한다.

우리나라는 공소 제기 이전에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고, 심지어 형법 제126조는 피의사실 공표죄라고 해서,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를 처벌하고 있다. 작년에 겪었던 조국 전 법무장관과 관련한 각종 보도로 인해 우리 국민은 피의사실 공표의 문제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

이와 유사한 처벌규정은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은 형법 제353조d 제3호에서 공소장, 기타 형사소송절차에서 공문서의 전부 또는 주요 부분을 공판에서 낭독 또는 소송절차 종료 이전에 공연히 공개한 자를 처벌하고 있다. 공판절차 개시 전 수사서류를 공개하면, 시민법관(배심원)과 증인의 공정하고 편견 없는 심리나 진술을 저해할 우려가 있기에 이를 처벌하는 것이다. 영국, 미국 등 다른 선진국도 유사하게 공소사실을 상세하게 공개해 배심원에게 선입견을 심어줄 우려가 있는 경우 이를 금지하고, 금지명령을 위반하면 법정모욕죄로 처벌한다.

우리는 검사의 공소 제기만 있으면 공소사실의 공개를 처벌하지 않지만, 선진국은 공소 제기 이후에도 공판절차가 개시되기 전까지는 공소사실의 공개를 처벌한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우리는 국민참여재판(배심제)의 경험이 일천해 이러한 차이를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도 2008년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해 일반 국민이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참여한다. 법원이 배심원의 평결을 존중해 93% 정도의 사건에서 판사는 배심원의 평결과 같은 판결을 내린다. 배심원단이 구성되기 이전에 공소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검찰의 주장인 공소장의 세세한 내용이 공개되어 버리면 피고인은 자신의 방어권을 행사할 겨를도 없이 진범으로 둔갑되어 비난받는다. 이것은 우리가 꿈꾸는 법치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국민의 알 권리도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공소장을 언제까지나 비밀로 한다는 것이 아니다. 공판절차가 시작되면 공판정에서 공소장을 낭독하게 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공개된 법정에서 알려지는 것이다. 한 달가량 후에 국민의 알 권리는 얼마든지 충족된다.

지난 촛불혁명을 경험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하면서,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다시 느낀다. 수십년 길들여진 잘못된 관행도 이제 바꿀 때가 되었다. 추미애 법무장관의 결정은 타당하지만 낯설 뿐이다. 비공개가 아니라 제출 유예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잘못된 관행을 바꾸고 잠시의 혼란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상훈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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