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번호 앞자리 2·4' 법적 여성에게만 허락된 한국의 여대 [가장 보통의 사람]

김희진·고희진 기자 2020. 2. 13.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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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2) 여대 입학의 조건

|법원보다 뒤처진 대학 2013년 이미 성전환 수술 안 해도 성 정체성 기준으로 성별정정 허가 서울 6개 여대, ‘법적 여성’ 학칙 주민번호 1·3은 지원 자체 불가능

서울 소재 6개 여대 입학 조건은 ‘여성’이다. 법에서 인정한 여성만 입학을 허용한다. 수술을 하지 않거나 법적 성별을 바꾸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대에 입학할 수 없다. 숙명여대에 지원한 트랜스젠더 ㄱ씨는 성별 정정까지 마친 ‘법적 여성’이었다. 입학 조건을 갖춰 논쟁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학내 반발에 부딪혀 입학을 포기했다.

해외 여대의 트랜스젠더 입학 정책은 포용적이다. 미국과 일본은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한 사람도 입학을 허용한다. ‘법적 여성’이 아니거나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아도 유연한 방법으로 성 정체성을 입증하도록 규정한다. ‘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트랜스젠더 정의에 따라 입학 정책을 마련한 것이다.

한국 대학의 트랜스젠더 학생에 대한 논의는 법원보다 뒤처져 있다. 한국에서는 2006년 대법원 판결 이후로 트랜스젠더에 의한 법적 성별 정정이 이뤄지고 있다. 2008년부터 성인, 혼인 여부, 성별 귀속감, 수술 여부, 생식능력 등을 고려해 법적 성별 정정 판결이 나왔다. 2013년 서울서부지법을 시작으로 하급심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에 대해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결정이 7차례 이뤄지기도 했다. 성기 유무 등 신체 조건을 떠나 개인의 인식이 성 정체성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대학의 입학 정책은 ‘법적 여성’을 고수하고 있다. 그마저 ㄱ씨 입학 포기 사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됐다.

경향신문이 서울 6개 여대에 확인한 결과 ‘법적 여성’만 여대 입학이 가능하다. 덕성·서울·이화여대는 학칙 입학 자격에 ‘고등학교 졸업자 및 동등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여자’라고 명시했다. 동덕·성신·숙명여대는 입학 자격에는 여자를 명시하지 않았다. 대신 교육 목적에 ‘여성 지도자’ ‘여성 전문인’ 양성을 적었다. 학칙에 따라 6개 여대 모두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4로 시작하는 ‘법적 여성’만 입학할 수 있다. 대학교에 지원할 당시 주민등록번호가 1·3이면 시스템에 입력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법적 성별을 정정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은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포용적인 해외 여대 미국 39개 여대 중 26개 학교 트랜스젠더 여성 입학은 물론 남성 정체화·논바이너리도 허용 학생 정체성에 대한 ‘인식’ 중요

해외에서도 과거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쟁점은 ‘법적 여성’이 아닌 ‘인식’이었다. 경향신문이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를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미국 밀스 칼리지가 처음 트랜스젠더 입학 정책을 수립한 후 미국 여대의 상당수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허용했다. 2017년 기준 39개 여대 중에서 26개가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허용한다. 이 중 법적 성별 정정을 입학 조건으로 명시한 학교는 4개뿐이다. 3개 대학은 법적 성별 정정을, 1개 대학은 법적 성별 정정 또는 성전환 수술을 요건으로 한다. 나머지 22개 여대는 트랜스젠더의 정의대로 “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무관하게 여성으로서 성별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을 입학 대상으로 한다.

미국 여대의 트랜스젠더 입학 정책 세부사항은 조금씩 다르다.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만 허용하거나 트랜스젠더 여성뿐 아니라 논바이너리(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사람)의 입학까지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정체화한 사람의 입학을 허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스미스 칼리지는 트랜스젠더 여성뿐 아니라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식하는 논바이너리도 입학할 수 있다. 지원자가 여성이라고 정체화한 ‘인식’을 인정한다. 성 정체성을 입증하기 위한 어떤 문서도 요구하지 않는다. 웨슬리 칼리지도 마찬가지다. ‘여성으로 살고 있고, 일관되게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인식하는 경우’ 입학을 허용한다. 입증은 부모, 교사, 성직자, 의료인 등이 작성한 편지로 가능하다.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 버나드 칼리지 등도 ‘인식’을 입학 기준으로 삼는다. 브린 마 칼리지의 경우 여성으로 인식하는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정체화한 사람도 입학할 수 있다. 대신 입증하는 데 법적 문서나 의학증명서를 요구할 수도 있다고 규정한다.

일본에서도 ‘법적 성별’이 아닌 ‘인식’을 기준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허용한 여대가 늘고 있다. 도쿄 분쿄구의 오차노미즈대학과 나라의 나라여대는 2020년부터 법적 성별 정정이 되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허용했다. 두 대학 모두 성별이 여성임을 입증하는 의사의 진단서를 내지 않아도 된다. 지원자는 자신이 여성이라고 인식하게 된 경위 등을 미리 서류로 제출한다. 센다이의 미야기학원 여대도 2021년부터 법적 성별과 무관하게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허용한다.

|법적 여성도 배척하는 사회 숙명여대 합격했던 트랜스젠더 법적 성별정정에도 학내 반발 학교생활 보호할 장치 못 갖춰 우리의 인권 논쟁 수준 드러내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ㄱ씨 사태로 한국 사회의 낮은 인권 논쟁 수준이 드러났다. ‘인식’이 아닌 ‘법적 성별’까지 바꾼 ㄱ씨의 입학은 논쟁 거리가 아니었다. 본인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법원을 통해 성별 정정까지 마친 ㄱ씨의 입학이 알려지자 논란이 되며 어그러진 것이다.

해외 여대가 성별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취지의 입학 정책을 펴는 동안, 한국 사회는 ‘인식’을 기준으로 한 트랜스젠더 입학 논의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숙명여대는 미국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 일본 오차노미즈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인식’ 여부로 입학을 허용하는 자매결연 대학들과 달리 숙명여대는 ㄱ씨의 입학 포기를 막지 못했다.

한국 대학은 성소수자의 학교생활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해외 여러 대학은 충분한 수의 성중립 화장실을 설치하고,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등을 위한 인권센터를 설립했다. 남성 또는 여성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하지 않는 주거 옵션도 제공한다.

스미스 칼리지는 홈페이지에 200개가 넘는 성중립 화장실과 탈의실을 마련했다고 소개한다. 성소수자를 위한 상담 서비스 등도 제공한다. 한국에서는 성공회대에서 2017년 최초로 성중립 화장실 설치를 추진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4년째 보류된 상태다.

김희진·고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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