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양승태 공소장'의 세 기둥, 현직 판사 무죄 판결로 무너지나?

임찬종 기자 입력 2020. 2. 16. 09:51 수정 2020. 2. 1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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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신광렬, 성창호, 조의연 현직 판사

법원은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돼 기소된 전·현직 판사들에 대해 최근 잇달아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특히 신광렬-조의연-성창호 등 현직 판사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2월 13일 1심 판결과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2월 14일 1심 판결의 논리는 의미심장합니다. 두 판결의 논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에서 받아들여질 경우, '사법농단' 의혹을 구성하는 3개의 파트 중 적어도 2개 파트에 대해선 상당 부분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 경향을 감안하면 나머지 1개 파트에 대해서도 무죄 선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 '사법농단'이란 무엇인가?

'사법농단' 사건이란 무엇일까요? 건조하게 말하자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판사들에 대한 인사권 등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과 법관의 독립을 위협한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법원 내부에서 진상조사를 할 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공소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019년 2월 11일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기소하면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한 308쪽 분량의 공소장은 '사법농단' 사건에 대한 가장 포괄적 내용을 담고 있는 공문서입니다. 특히 검찰은 18쪽부터 시작되는 "범죄사실"이라는 대목에서 '사법농단'이라는 복잡하고 방대한 사건을 5개의 파트로 구조화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장 등이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저지른 혐의를 받는 여러 가지 사건을 아래의 5개 범주로 분류한 것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물론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법농단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은 '검찰의 주장'일뿐 재판을 통해 확정된 사실이 아닙니다. 고위공직자나 대기업 관련 사건의 경우 무죄가 선고되는 비율도 평균에 비해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시 다른 사건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소장은 증거수집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기관이 작성한 공문서이며, 증거관계와 논리에 대한 지적 없이 간단히 일축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닙니다. 많은 진보적 법률가나 정치인들이 공소장에 근거해 정치인이나 법관 등에 대해 비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한, 공소장에 적힌 사실관계가 정확한지, 이에 대해 저널리즘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와 형사적으로 범죄가 성립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검찰이 공소장에 밝힌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고, 이 같은 사실이 헌법적 관점이나 윤리적 관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해도, 형법상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법원이 판단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소장의 "범죄사실" 파트 소제목]

1.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의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
2.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3. 부당한 조직 보호
4.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편성 및 집행
5. 기타 범행 – 형사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 위반(피고인 박병대의 범행)

검찰이 붙인 소제목만 봐도 핵심은 1번-2번-3번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4번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편성 및 집행"은 재판이나 법관의 독립과 직결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업무추진비 처리 관행에 대한 혐의에 가깝고, 5번 "기타 범행 – 형사사법절차전자화촉진법 위반"은 박병대 전 대법관의 개인적 혐의이기 때문입니다. (박병대 전 대법관은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 '양승태 공소장'을 구성하는 3개의 기둥

검찰이 구성한 '사법농단'의 구조,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위협한 혐의의 세 기둥인 "1.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의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 2.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3. 부당한 조직 보호"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지 좀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의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

키워드: 재판개입 및 재판거래 의혹 (강제징용 등)

박근혜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재판에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대가로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의 위상 강화와 관련된 사안에 대한 청와대 측의 협조를 얻어내려고 시도한 '재판개입 및 재판거래' 의혹.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의 재판개입 의혹 등도 포함됨.) 대표적인 사례로는 강제징용 관련 소송, 통합진보당 관련 소송 등이 있음.

2.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키워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추진하는 사업에 비판적 입장을 밝힌 판사나 대한변호사협회 등 외부 인사를 탄압한 의혹. 비판적 성향의 판사들을 사찰하고 인사 과정에서 불이익을 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대표 사례.

3. 부당한 조직 보호

키워드: '정운호 게이트' 확대 저지 및 '부산 스폰서 판사' 사건 은폐 의혹

법원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해 현직 판사와 관련된 법조 비리 의혹을 은폐하거나 수사 확대를 저지하려고 시도했다는 의혹. 검찰의 '정운호 게이트' 관련 수사 확대를 저지하려고 '검찰총장 압박 문건'을 작성하고 영장재판 가이드라인'을 판사들에게 전달했다는 의혹과 부산 스폰서 판사 사건을 법원행정처가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 등.

● 현직 판사 무죄 판결이 미치는 영향 1: "부당한 조직 보호"는 없다.

그런데 신광렬-조의연-성창호 판사에 대해 2월 13일에 선고된 무죄 판결의 논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받아들여질 경우 "3. 부당한 조직 보호" 부분이, 2월 14일에 선고된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무죄 판결 논리가 받아들여질 경우 "1.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의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 부분이 무죄로 판단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양승태 공소장'의 3개의 기둥 중 2개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셈입니다.

신광렬-조의연-성창호 판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정운호 게이트' 관련 수사기록이라는 공무상비밀을 법원행정처 측에 누설한 혐의입니다. 2016년 '정운호 게이트'에 현직 법관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다른 판사들에게까지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원행정처가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였던 신광렬을 통해 영장판사 조의연-성창호로부터 검찰이 영장재판(영장심사)을 위해 법원에 제출한 수사기록의 사본을 넘겨받아 수사상황을 파악했고, 역시 신광렬을 통해 법관과 관련된 영장심사를 엄격히 하라는 취지의 '영장재판 가이드라인'을 영장판사들에게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소장의 범죄사실 파트 3번 "부당한 조직 보호"의 핵심과 직결되는 내용입니다.

신광렬 부장판사 (사진=연합뉴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방법원 23형사부(재판장 유영근, 판사 신동주, 판사 배인영)는 무죄를 선고하면서 법원행정처가 "부당한 조직 보호"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문에 못 박았습니다. 재판부는 "법원행정처의 수사 확대 저지 목적과 검찰 압박 방안 등에 관하여"를 핵심 쟁점 중 하나로 소개하면서 "법원행정처 내부에서 법관에 대한 수사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수사나 재판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검찰 압박 방안을 마련하여 실행에 이르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규정했습니다.

판결에 등장하는 여러 쟁점 중 하나일 뿐이지만, 어쩌면 이 판단은 무죄 판결 그 자체보다 사법농단 사건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신광렬-조의연-성창호 판사가 공무상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그치지 않고, 당시 법원행정처가 '정운호 게이트'와 관련된 현직 법관들에 대한 수사 확대를 저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법원행정처의 "부당한 조직 보호" 시도가 없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셈입니다. 만약 이 논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양승태 공소장'의 3개의 기둥 중 하나는 상당 부분 무너지게 됩니다.

● 현직 판사 무죄 판결이 미치는 영향 2: "재판개입"은 범죄가 아니다.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무죄판결은 '양승태 공소장'의 범죄사실 1번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의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과 논리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1번 파트의 핵심은 재판개입과 이를 통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 의혹입니다. 그런데 2월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5형사부(재판장 송인권, 판사 김택성, 판사 김선역)는 임성근 부장판사의 재판개입 행위는 범죄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재판과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 판사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 권한(직권)은 없기 때문에,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아닌 고위 법관이 재판에 개입했더라도 직권을 남용한 범죄라고 볼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이 사건 각 재판관여 행위는 피고인의 지위 또는 개인적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피고인의 행위가 위헌적이라는 이유로 직권남용죄의 형사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범죄구성요건을 확장 해석하는 것이어서 이 또한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되어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논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에서도 받아들여진다면 범죄사실 파트 1 "상고법원 추진 등 법원의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의 전제인 '재판개입' 행위에 대해선 대부분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큽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이었던 임성근 판사가 사건을 담당한 판사에게 판결 선고 이전에 일부 쟁점에 대한 '중간판결'을 법정에서 밝히라고 요구하고, 판결이 선고된 이후에 판결문을 일부 수정하라고 요구하고, 유명 운동선수 관련 사건을 정식재판에 넘기려고 마음먹은 판사에게 약식명령으로 종결하라고 요구한 행위가 범죄가 될 수 없다면, 통합진보당 관련 재판이나 헌법재판소 관련 사건 등에 개입한 법원행정처의 행위 역시 범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2월 13일과 14일, 이틀에 걸쳐 선고된 현직 판사 4명에 대한 무죄 판결은 양승태 공소장의 핵심 논리 중 약 3분의 2를 사실상 부정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선고된 다른 판결들을 살펴보면 나머지 3분의 1에 대해서도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 나머지 '3분의 1'의 무죄 가능성은?

나머지 '3분의 1'에 해당하는 "2.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의 핵심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핵심 사업을 비판한 판사들을 사찰하고, 이들을 음주운전이나 성추행을 한 판사들과 함께 "물의 야기 법관" 명단에 올려 인사에서 불이익을 준 혐의입니다. 검찰은 이와 관련해 역시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이 구성한 직권남용 혐의 논리 구조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검찰은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파트에 등장하는 많은 범죄사실에 대해, 인사권이라는 직무상 권한(직권)을 남용해 특정 판사에게 부당하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기소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경우 대법원장이 자신의 참모에 해당하는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부당한 인사 방안 등을 마련하도록 "의무에 없는 일"을 시켜 직무상 권한(직권)을 남용한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물의야기 법관" 같이 물증에 해당하는 문건이 있고, 문건에 나오는 부당한 인사 조치가 실행된 것이 확인된 경우에는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준 혐의로 직접적으로 기소했지만, 법관을 사찰하거나, 비판적 성향의 법원 내부 연구모임을 와해하는 방안을 마련하거나, 변호사협회를 압박하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법관에 대한 부당한 징계를 검토하라고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법원행정처 심의관 등에게 지시한 경우에는 심의관들에게 "의무에 없는" 부당한 일을 하게 한 혐의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기소한 것입니다. 대법원장의 직권 남용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대상을 논리적으로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상정한 셈입니다. 법률적 용어는 아니지만 우회적 방식의 기소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인사 불이익 조치가 실행된 경우에도 해당 법관에게 부당하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조치 방안을 마련하도록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지시해서 심의관들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한 혐의로도 함께 기소했습니다.)

● 안태근-김기춘 판결의 영향: "법령에 명시된 구체적 기준 필요"

그런데 이와 유사한 논리 구조는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인물로 지목된 안태근 전 검찰국장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안태근 전 검찰국장은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것이 아닙니다. (사건이 폭로됐을 때 이미 성추행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났습니다.) 안태근 전 검찰국장은 자신의 비행을 증언할 수 있는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의 사직을 유도하기 위해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서지현 검사에게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한 혐의로 기소된 것은 아닙니다.

인사 실무를 담당한 검사에게 서지현에 대해 인사 배치 기준에 어긋나는 부당한 인사 조치를 하도록 지시해 검찰국장으로서의 직무상 권한을 남용한 혐의로 기소된 것입니다. 안태근 전 검찰국장의 직권남용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대상을 논리적으로는 서지현 검사가 아니라 인사 실무를 담당한 검사로 상정한 것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직권남용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대상을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상정한 것과 사실상 동일한 논리구조입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1월 9일 안태근 전 검찰국장을 무죄로 판단하는 취지의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실무를 담당한 하급자의 업무와 관련해서 "직무집행의 기준과 절차가 법령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고, 실무 담당자에게도 직무집행의 기준을 적용하고 절차에 관여할 고유한 권한과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면 실무 담당자로 하여금 그러한 기준과 절차를 위반하여" 일을 하게 한 경우에만 상급자에게 직권남용죄가 성립된다고 밝혔습니다.

즉,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부당한 업무를 지시한 행위에 직권남용죄가 적용되는 것은 하급자가 수행하는 업무의 기준과 절차가 법령에 명시돼 있고, 하급자 역시 업무에 대한 일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급자가 법령에 명시된 기준과 절차를 무시하는 일을 하급자에게 시켰을 경우로만 한정된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인사 담당 실무를 맡은 검사가 서지현 검사를 통영지청에 배치하면서 3개 청 이상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경력검사'를 우대하는 인사 방침을 위배했다고 하더라도, 경력검사 우대 방침은 실무자에게 준수 의무가 있는 법령에 명시된 기준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관련 지시를 한 것으로 보이는 안태근 전 검찰국장이 직권을 남용해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 취지의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마찬가지 논리는 1월 30일에 선고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발견됩니다. 대법원은 직권남용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한 것뿐만 아니라, 직권 남용의 대상인 하급자가 그 결과로 법령상 의무에 없는 일, 즉 법령에 명시된 기준이나 절차에 위배되는 일을 실제로 하게 됐는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다시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한 2심 판결 중 법령에 의무와 절차가 명시된 행위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나눈 뒤 일부 혐의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하급심 판단의 기준이 되는 대법원 판결 논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 적용될 경우, 결국 나머지 '3분의 1'인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분야에 해당하는 혐의 중 상당 부분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파트의 상당 부분은 비판세력에게 불이익을 준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기소된 것이 아니라,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참모인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부당하게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태근 판결'이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판결'의 논리에 따르면 1.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시가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의무적으로 따랴야 하는 법령에 규정된 절차와 기준을 위배하도록 만든 것이고 2.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업무에 대한 일정한 재량권이 부여되어 있을 경우에만 직권남용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만약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심의관들이 법령에 규정된 절차나 기준을 위반하도록 지시한 점 등을 입증하지 못하면 이 대목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무죄가 선고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소장에는 방대한 범죄 혐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큰 줄기에서 같은 분야로 분류되더라도 구체적인 사실관계나 법리 적용은 다른 혐의들이 많습니다. 최근 법원 판결 논리가 큰 틀에서 반영되더라도 개별 범죄 혐의 판단 때는 사안마다 다르게 적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탄핵과 입법: 국회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지난주에 선고된 현직 판사들에 대한 1심 무죄 판결, 그리고 1월에 선고된 안태근 전 검찰국장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감안하면 '양승태 공소장'의 범죄사실을 구성하는 3개의 기둥은 상당 부분 무너질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법농단 사건뿐만 아니라 이른바 '적폐청산' 사건 전반에 걸쳐 직권남용죄를 적극적으로 적용해왔던 검찰의 기소 방침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또, 지난 정부 인사들을 '청산'하는 과정에서는 재판에서도 직권남용죄의 적극적 해석을 인정해왔던 법원이 전·현직 법관들이나 현 정부 관계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자 직권남용죄에 대한 엄격한 해석을 강조하면서 '스트라이크존을 좁히는'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사법농단에 대한 판결이 엄격한 기준 적용을 이제라도 강조한 것인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기준을 탄력적으로 적용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범죄 성립 여부와 별도로 윤리적으로 지극히 부적절하거나 헌법에 반하는 행위로 재판에서까지 인정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방법입니다. 법원 내부 주류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정치적 공격이었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행위의 경중에 따라서 책임의 차등을 두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재판을 통해 위헌적 행위를 한 것으로 확인된 현직 고위 법관들에 대해서는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탄핵 절차를 통해서 책임을 규명하는 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또, 헌법적 관점이나 상식적 관점에서 부당한 일로 확인된 일들에 대해 직권남용죄로 처벌하는 것이 부당하다면, 사법방해죄나 법왜곡죄 등 새로운 법률을 만드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사상가 데이비드 흄은 "최상의 존재의 부패가 가장 나쁘다. (Corruptio optimi pessima)"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는 법원의 판결은 언제나 가능한 최상의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최상의 것이라는 믿음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법관의 독립이 무너지고, 최상의 판결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 갈등과 분쟁을 종식할 평화적 방법은 없어집니다. 사법농단을 이용해 생각지도 못했던 이익을 본 사람들은 물론 여럿 있습니다. 분별없는 행동으로 사건의 정당성을 흐린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된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는 법관과 판결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사법농단 재판뿐만 아니라 탄핵 절차와 입법을 담당한 국회의 움직임을 지켜봐야 할 이유입니다.       

임찬종 기자cjy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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