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멧돼지 고통없이 안락사..민통선 근방은 돼지열병 전쟁터

김성은 기자 2020. 2. 17. 07: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치료제 없는 돼지열병..멧돼지 약 1만마리 살처분
3월부터 멧돼지 개체수 급증 예상..당국 '비상'
포획틀 안에 갇힌 멧돼지.(문화재청 제공) © 뉴스1

(서울=뉴스1) 김성은 기자 = 가로 250㎝, 세로 60㎝의 포획틀 철창 속에 땅콩 같은 줄무늬가 아직 남아 있는 생후 2개월가량의 새끼 멧돼지가 천연스럽게 노닐고 있었다.

"미안하다. 네게 무슨 죄가 있겠니…."

아프리카돼지열병(ASF) 검사를 담당하는 국립환경과학원 소속 정원화 팀장은 멧돼지를 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였다.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몰려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차라리 무게 약 150~200㎏의 다 큰 멧돼지들처럼 철창을 격렬하게 들이받으며 저항이라도 했다면 죄책감이 덜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정 팀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멧돼지를 마취시켜 잠들게한 뒤 고통 없이 안락사시키는 일이었다.

'훅!'

정 팀장이 긴 대나무통같은 마취총의 한 끝을 단숨에 불자 통 안에 있던 주사기가 멧돼지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 다리에 꽂혔다. 정 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야생으로 숨은 ASF…연천·파주·철원은 '오염지역'이 됐다

ASF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건 지난해 9월 16일 경기 파주시의 한 돼지농장이다. 이후 ASF 바이러스는 사육 돼지에서 야생 멧돼지로 숙주를 갈아탔다. 2019년 10월 3일 경기 연천의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가 처음으로 검출됐다.

인간의 통제가 어려운 야생으로 숨어든 ASF는 멧돼지 몸을 숙주로 민통선을 따라 세력을 넓혀 나갔다. 강원 철원, 경기 파주에서 ASF 감염 멧돼지 폐사체가 잇따라 발견됐다. 경기 연천·파주, 강원 철원은 'ASF 오염 지역'으로 통했다.

전세계적으로 ASF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탓이다. 치사율도 100%에 달한다. 현재로선 '오염' 지역의 멧돼지를 모두 살처분하는 것 외에 ASF를 박멸할 방도가 딱히 없다.

미생물 생태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 팀장이 ASF 업무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건 야생 멧돼지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된 지난해 10월이었다. 민통선 근처에서 채취된 멧돼지 비장을 시료로 삼아 ASF 바이러스 보유 여부를 검사하는 일이 정 팀장의 주된 업무였다. 군인과 엽사를 대동해 산속 멧돼지 폐사체 신고 지점을 찾아가 직접 시료를 채취하기도 했다.

그는 개천절이었던 지난해 10월 3일 야생 멧돼지에서 첫 ASF 바이러스가 검출된 연구실 현장에 있었다. 그날 밤 9시쯤 비무장지대(DMZ) 멧돼지 사체로부터 거둬들여진 시료가 흰 아이스박스에 담겨 국립환경과학원으로 운반됐다. 정 팀장은 곧바로 직원에게 ASF 바이러스 검출 실험을 지시했다.

"팀장님, 피크(peak) 떴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부하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실험 결과 그래프에는 산 모양의 '피크'가 오롯이 솟아 있었다. 애초에 ASF가 없었다면 편평했어야 할 부분이었다. 순간 정 팀장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일단 수화기를 들고 환경부 ASF 대응상황실로 전화를 걸어 '의심 보고'에 들어갔다.

"연천군 디엠지 내에서 가져온 멧돼지 시료에서 ASF 양성이 의심됩니다.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밤을 꼬박 새우며 실험을 5번 더 반복했다. 결과는 모두 양성. 민통선 인근에서 야생 멧돼지를 잡으려는 인간과 이를 피해 도망가려는 멧돼지 간의 '전쟁'이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설치한 야생멧돼지 차단 광역 울타리(파주 적성면) (환경부 제공) © 뉴스1

◇광역 울타리로 만든 '멧돼지 감옥' 안에선 대대적 살처분

정부는 민통선 인근을 중심으로 경기·강원을 가로지르는 1·2단계 광역 울타리를 쳤다. 위로 DMZ 비무장지대 철조망과 아래로 광역 울타리로 막힌 '멧돼지 감옥'이 완성됐다. 광역 울타리는 ASF 바이러스 남하를 막는 일종의 저지선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엽사 200여명이 투입된 것으로 전해졌다. 수컷, 암컷, 성체, 새끼 등 가릴 게 없었다. 모두 잠재적 ASF 감염원으로 취급됐다. 대대적인 멧돼지 살처분이 시작됐다.

약 4개월 동안 이 지역 멧돼지 폐사체에서 채취된 시료 약 8000건이 국립환경과학원으로 들어왔다. 엽사의 총에 맞은 멧돼지 사체로부터 300여건 정도의 시료가 나왔다.

정 팀장이 현장을 다니며 직접 채취한 멧돼지 시료만도 200여건에 달했다. 하루에 많게는 20마리를 안락사시켰다. 종종 마취약이 부족할 때마저 있었다.

물론 멧돼지가 우리나라에서 상위 포식자로 올라선 것도 인간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해수구제(害獸驅除) 사업을 빙자해 한반도 호랑이, 표범 등의 대형 육식 포유류가 대량 학살되면서다. 멧돼지의 상위 포식자가 사라지면서 자연적으로 멧돼지 개체수를 조절할 방안이 사라졌다.

먹이사슬 균형이 무너진 생태계에서 멧돼지 개체수의 증가는 결국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결과로 돌아왔다. 먹이가 부족한 멧돼지들은 논밭으로 내려와 땅을 마구 헤집어놨다.

멧돼지는 이제 ASF의 희생양이 됐다고 정 팀장은 말했다. 인간의 식량인 돼지에게 ASF를 옮기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대대적인 멧돼지 살처분이 이뤄지진 않았을게다.

"현장에서 가끔씩 멧돼지를 봐요. 철원 멧돼지들은 사람들을 친근하게 느끼는지 잘 도망가지도 않더라고요. 어미 멧돼지가 새끼 네댓 마리를 데리고 길을 따라 걷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그러나 정 팀장에게 멧돼지들의 평화로운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민·관·군이 강원 화천군 파로호 등지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작업을 펼치고 있다. (화천군청 제공) 2019.10.2/뉴스1 © News1 홍성우 기자

2월 7일 신고된 멧돼지 시료에서 다시금 '피크'가 떴다. 발견 지점은 광역 울타리 '밖'인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방천리 산 12번지다. 화천읍과 양구읍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폭 약 500m의 파로호(湖)의 남쪽이다.

광역 울타리는 물론 호수라는 거대한 자연적 장벽마저 건너간 멧돼지에 그는 허탈함을 넘어 참담함마저 느꼈다.

이윽고 인근 산에서 또 다른 멧돼지 폐사체가 발견됐다. 이 역시 광역 울타리 밖이었다. 정 팀장은 복잡한 심경으로 해발 1000m 이상의 험준한 산을 올랐다.

'멧돼지가 파로호를 헤엄쳐서 건넌 것일까. ASF가 대체 호수를 어떻게 넘었단 말인가.'

정 팀장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돼지 농가로 ASF가 퍼지면 피해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광역 울타리 안에 있는 멧돼지를 제대로 살처분하는 것만이 멧돼지와 인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었다.

◇기껏 개체수 줄였는데…3월부터 출산 개체수 확 늘어 3월부터는 번식기를 거친 어미 멧돼지가 새끼를 낳기 시작하면서 개체수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됐다. 기껏 줄여놓은 멧돼지 수가 다시 불어나는 것이다.

최근엔 햇살이 따스해지면서 민통선 인근 땅 위로 0.5㎝가량 얼어붙어 있던 눈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눈 사이로 축축한 진흙이 드러났다. 동식물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봄이 되면 ASF 전염에 속도가 붙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현장에서 멧돼지를 보는 족족 엽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게 인간도 멧돼지도 살길이다.'

정 팀장은 이렇게 믿었다. 광역 울타리가 세워진 민통선 인근 3월의 하늘은 멧돼지 사냥을 위한 총성을 예고하고 있었다.

sekim@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