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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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총선용 '반일 감정 조장'이란 자살골

남정호 입력 2020. 02. 18. 00:34 수정 2020. 02. 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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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시진핑 방한 등 선거 호재 상실
선거 위해 한·일 관계 방치할 수도
결국은 국민 신뢰 놓치는 자충수
남정호 논설위원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의 주간(週間) 지지율이 단숨에 4.0%포인트나 치솟은 적이 있다. 2018년 9월 남북 정상회담 이래 지금껏 이런 경우는 없었다. 여당 지지율도 3.6%포인트나 뛰었다. 반면에 야당은 3.2%포인트 빠지면서 8.3%포인트였던 여야 간 격차가 15.1%포인트 차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원인은 반일 감정이었다.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 일본의 보복 소식이 돌면서 반일 정서가 들끓었던 거다. 문 대통령과 여권은 세게 나왔지만 야당은 “일본을 잘못 다룬 탓”이라며 어설프게 여권을 공격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반일 감정에 지지율이 춤추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에 갔을 때도 지지율은 6%포인트 확 뛰었다. 부패 혐의로 친형 이상득 의원이 구속되면서 인기가 떨어지자 반일 카드를 썼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렇듯 반일 감정이 거세질수록 정권 지지율이 높아지는 건 철칙이 됐다.

총선을 앞둔 요즘 여권은 여간 답답한 게 아닐 것이다. 선거 호재들이 줄줄이 엎어진 까닭이다. 치적으로 삼을 만한 김정은 답방과 시진핑 방한 모두 얼어붙은 한반도 상황과 코로나19 탓에 물 건너갔다. 그러니 여권으로선 반일 감정 공략이 군침 도는 카드로 보일 게 자명하다.

이런 와중에 최근 청와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를 재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후 맥락상 그럴듯한 얘기지만 미국을 의식한 까닭인지 청와대는 보도를 부인했다. 하지만 한·일 관계가 총선과 무관할 걸로 속단해선 안 된다. 반일 감정을 폭발시킬 뇌관이 건재한 탓이다. 바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차원의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조치다. 일본 정부는 그간 “현금화 시 즉각 보복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 관계는 회복 불능이 될 게 뻔하다.

사태의 절박함을 아는 전문가들은 정부가 나서 줄 것을 촉구한다. 일부는 양국 사법부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피해자를 구제하는 ‘법률적 화해’ 방식을 주장한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자는 ‘문희상 안’을 제시했다.

이렇듯 여러 해법이 있음에도 정부는 협상 시늉만 낼 뿐 현 상황을 방치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현금화 시기 등은 사법 절차의 한 부분이어서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이달 초 발언이 그 증거다. 총선 전 현금화가 이뤄지면 일본의 보복에 이어 반일 감정이 폭발하면서 여권에 유리한 국면이 펼쳐질 게 틀림없다. 법원이 현금화 단행 시기를 잘 골라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칫하면 법원이 여권 편을 든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정부 역시 한·일 관계를 방치하면 총선을 위해 소극적인 ‘국면 전환용 외교정책(diversionary foreign policy)’을 쓴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아울러 이 전략은 중대한 결함을 내포한 자충수라는 점도 여권은 명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분쟁 결과가 좋지 못하면 결정적인 내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다. 부시가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자 지지율은 20%포인트나 올랐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부시가 침공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고 미국이 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자 그의 인기는 끝없이 추락했다. 결국 9·11 사태 직후 92%까지 올랐던 지지도는 퇴임 때 23%로 추락,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게 됐던 것이다.

강제징용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이 이 난제를 적극적으로 풀지 않고 놔두면 조만간 반일 감정의 시한폭탄이 터질 것은 분명하다. 이 덕에 총선에서 반짝 재미를 볼지 모르나 길게 보면 국민적 신뢰를 잃게 된다. 정권 교체를 앞당길 자살골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외교 사안을 정략적으로 악용해선 안 된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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