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끊으면 공범" 11시간 겁박, 취준생 사기인 줄 모르고..

고성표 2020. 2. 2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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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선택으로 내몬 범죄 시나리오
서울중앙지검 김민수 검사 사칭
"금융사기 연루" 압수수색 들먹이고
위조 신분증 보내 의심 완벽 차단
순창서 430만원 인출, 서울행 유도
"내 실수로 검사님과 통화 못 해.."
사흘 뒤 유서엔 처벌받을까 자책감

보이스피싱 ‘그놈 목소리’ 담긴 녹취록 보니
2018년 1월 경기도 고양시 한 택배 보관함에서 보이스피싱 인출책이 현금 700만원을 빼돌렸다. 김여진 인턴기자
“저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입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국민과 나누고, 아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청원합니다”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내 아들 죽인 얼굴 없는 검사 김민수 잡을 수 있을까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에 따르면 아들 A(28)씨는 전북 순창에서 취업을 준비하던 청년이었다. 지난달 20일 A씨는 검사와 수사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전화 금융사기) 조직원들에게 속아 430만원을 뜯겼다. A씨는 사흘 뒤인 지난달 22일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돈 몇 백만원을 사기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보이스피싱 일당들과의 통화 내용을 담은 음성 파일이 남아 있었다. 이 음성 파일과 유서에 따르면 A씨는 끝내 자신이 사기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3일 동안 금융사기 범죄의 공범으로 몰려 자칫 구속되는 등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도대체 그날 A씨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중앙SUNDAY는 그가 남긴 11시간가량의 통화 녹음 파일(A4 용지 녹취록 200페이지 분량)을 입수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의 음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 음성 파일의 내용은 한 편의 적나라한 범죄 시나리오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A씨가 의심하지 않도록 위조한 검사 신분증을 e메일로 보내주고, 해당 사건 수사 관련 가짜 공문서를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다.

“이도현 수사관입니다, 최민경 아세요”

가짜 검찰 수사 관련 공문서. [중앙포토]
지난달 오전 9시 50분, 순창에서 취업 준비를 하던 A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OO씨 본인이시죠?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 수사1부 1팀 이도현 수사관입니다.”

자신을 검찰 수사관이라고 밝힌 이는 대뜸 “서울 출신 37세 최민경이라는 여성을 아느냐”고 물었다. A씨가 “모른다”고 하자 “최씨를 주범으로 한 금융 사기단 28명을 검찰이 검거해 수사 중이며, 현장에서 압수한 대포통장 중 A씨 명의의 통장 두 개가 발견됐다”고 했다. 그의 설명은 계속됐다.

“전국적으로 200여 명 가까이 연루된 대형 사건입니다. 당신은 ‘특급’으로 분류됐어요. 피해자인지 공범인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데 전화 협조가 안 되면 검찰에 나와 조사받아야 합니다.”

이들은 인터넷으로 계좌 통합 관리서비스에 접속한 뒤 A씨 명의의 금융 계좌가 몇 군데 있고 또 돈은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확인해보라고 요구했다. A씨는 “농협 입출금 통장에 434만원, 부모님이 자신의 명의로 만든 산림조합 계좌에 3000만원이 있다”고 답했다. 잠시 후 사건 담당 검사라고 밝힌 사람이 전화를 건네받았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 수사팀 팀장 김민수 검사에요. 체포한 최민경 일당은 일반인이 아닌 전산 담당을 하는 금융 전문가들입니다. A씨 명의의 금융 자산도 범죄에 이용될 수 있으니 우선 국가 기관이 임시로 보호조치를 한 후, 피해자로 확인되면 원상 복구시킬 예정입니다.”

그러면서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간다고 압박했다. 또 수사 보안 때문에 제3자 누구에게도 얘기하면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이들은 A씨가 의심할 것을 대비해 수사 방식에 대한 설명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우선 압수수색을 통한 수사 방식이 있어요. 다음 주 수요일 오전 9시 30분까지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야 합니다. 3일 동안 조사받아야 하니 세면도구 챙겨오세요. 혐의점이 발견되면 구속된 상태에서 최대 90일 동안 수사를 받게 됩니다. 이 방식을 택하면 지금 통화는 바로 종료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카드를 포함한 A씨의 모든 금융 자산은 동결되고, 해외 출국도 금지가 됩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수사 절차나 관련 법을 잘 모르고 있던 A씨에게 ‘압수수색’이니 ‘자산 동결’ ‘출국금지’라는 말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두 번째 선택지라며 ‘협조 수사’ 방식을 설명하며 자신들의 의도대로 상황을 몰고 갔다.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르면 전화 조사만으로 수사를 신속히 끝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A씨가 전화 수사협조 방식을 택하자 이들은 가하던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전국적으로 수사 대상자가 많지만 A씨는 특별히 동생 같고 조카 같은 생각이 들어 우리가 최대한 도와주겠다”며 안심시켰다. 긴장감을 높였다가 조금씩 풀어줌으로써 심리적으로 자신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수법이었다. 이들은 A씨에게 행동 요령과 주의사항을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모바일데이터, 와이파이 등은 꺼놓아야 한다”거나 “보조배터리와 이어폰을 준비하고 절대로 전화를 끊으면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통화 2시간여가 지난 오후 12시께 이들은 A씨에게 농협과 산림조합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A씨는 순창과 정읍 소재 산림조합 지점에서 3000만원 계좌를 해지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A씨의 농협 입출금 계좌에 있는 430만원이 보이스피싱 일당들의 최종 먹잇감이 됐다. A씨는 이들의 지시대로 5만원권으로 전액을 인출한 뒤 정읍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는 기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객실 내 화장실에서 수차례 전화 지시를 받았다.

통화 9시간여 만인 오후 6시 30분께A씨는 용산역에 도착했다. 이후 지시대로 마포구 도화동 주민센터로 갔다. 보이스피싱 일당들이 사전 답사를 통해 물색해 놓은 장소였다. 주민센터에 있는 여성 안심 택배 보관함에 돈을 넣은 A씨는 “금융감독원이 있는 여의도로 가 정해진 시간에 수사관과 만나 신원 확인만 하면 다 끝난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이동했다. A씨가 주민센터를 떠나 여의도로 가는 동안 보이스피싱 조직 인출책은 택배 보관함에서 돈을 찾아 사라졌다.

여의도에 도착한 A씨가 이들 일당과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오후 8시 50분께였다. “20분 후에 (금감원) 1층 로비에 수사관이 도착하니 만나면 된다”면서 “통화 종료 후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대기하다 15분 후 다시 켜면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세 번 전화해서 받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고 처벌받을 수 있다”는 식의 엄포도 놓았다.

경찰 “전화통화로 사건 조사 안 해”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A씨는 마지막까지 시키는 대로 따랐지만 끝내 이들과는 통화할 수 없었다. A씨는 유서에 “내 실수로 검사님과 통화하지 못해 공무집행방해죄로 2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의 벌금을 내게 생겼고, 공개 수배도 될 것 같다”며 오히려 자신을 원망했다.

취재과정에서 A씨처럼 취준생 신분인 B씨 역시 지난해 5월 거의 유사한 수법으로 피해를 볼 뻔한 사연을 접했다. B씨는 수사관을 사칭한 사람의 전화를 받고 3시간 넘게 통화했다. 그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직인이 찍힌 검찰 수사 관련 공문서(사진)를 전달받고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고 말했다. 이 공문서는 물론 가짜였다.

김진용 한국금융범죄예방센터 상임이사는 “검사나 수사관 등 기관원을 사칭한 수법은 오래됐다”면서도 “상대를 속이기 위한 대화의 기술 등이 더 정교해져 여전히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A씨처럼 취준생이거나 사회 초년생, 그리고 군이나 학교 등에서 엄격한 조직 생활을 하다 막 은퇴한 장년층이 주 타깃이다. 김 이사는 이어 “이번 사건에서도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항상 질문을 던지고 A씨에게 ‘네’라는 답을 유도하거나, 공포감과 함께 안도감도 주면서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계속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 관계자는 “수사기관은 전화 통화 방식으로 사건 조사를 진행하지 않는다”며 “비슷한 피해 사례가 전국적으로 자주 발생하니 기관 사칭 전화에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성표 기자, 김여진 인턴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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