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 미국인 왜 데려왔나" 트럼프 분노 유발한 '6년전 기억'

박현영 2020. 2. 2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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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일본 크루즈선 미국인 14명 감염된 채 귀국
뒤늦게 안 트럼프 "결정 동의하지 않아" 격노
"신종 코로나, 11월 트럼프 재선 최대 변수"
에볼라 때 오바마, 중간선거 상·하원 모두 져
전문가 "美 보고 안 된 사례 수백건 있을수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올해 미국 대선에 변수로 등장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6일 일본 요코하마항에 정박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 미국인 승객 328명이 하선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판명돼 미국 정부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이들이었다. 이들을 태운 버스 10여대가 도쿄 하네다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보가 날아들었다. 14명이 신종 코로나 양성으로 나왔다고 일본 보건당국이 통보한 것.

감염자는 비행기에 탈 수 없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하선 시점을 기준으로 이미 대피 작전에 포함된 이들을 두고 가면 또 다른 논란이 생길 염려도 있었다. 워싱턴에선 논쟁이 벌어졌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전문가들은 “확진자와 건강한 사람을 한 비행기에 태우면 안 된다”며 반대했다. 보건부는 환자를 돌보기 위한 준비가 돼 있으니 모두 데려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무부가 보건부 손을 들어주면서 전원을 태운 전세기가 이륙했다.

순조롭게 끝나는 듯했던 대피 작전은 전세기가 미국에 착륙하기 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확진자 14명이 포함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격노했기 때문이다. 사전 대책회의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감염자는 일본에서 치료받게 된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을 승낙했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이던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탑승했던 미국인들이 지난 17일 미국 정부가 마련한 전세기에 오르기 위해 도쿄 하네다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는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과 알렉스 아자르 보건부 장관,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뒤 불만을 폭발시키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이후 백악관 참모들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최종 결정권자는 자신이었어야 했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또 이번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백악관 한 관료는 대통령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은 것은 “작전상의 큰 실수”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분노한 이유를 두고 워싱턴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국수주의적 성향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2014년 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확산하자 미국 국경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위터에 “에볼라 감염이 나타난 모든 나라로부터 항공편을 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염병이 우리 국경 안에서 퍼질 것”이라고 썼다. 에볼라를 치료하다 감염된 미국 의료진의 귀국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공개적으로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이를 실천에 옮겼다.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가 발생하자 이달 초부터 중국을 여행한 지 14일이 지나지 않은 외국인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다. 미국인이나 미국인 직계 가족은 입국을 허용하되 14일간 자가격리를 명령했다. 미국과 중국을 오가는 항공편 대부분이 운항을 멈춘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코로나19 대응.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신종 코로나가 미국에서 확산할 경우 재선 가도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전문가를 인용해 “대통령 재선과 관련해 현재 가장 큰 위협은 신종 코로나 사태가 통제력을 벗어나 보건 행정과 경제에 충격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의회전문매체 더힐은 트럼프가 재선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로 경제 안정과 미국인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꼽았다. 신종 코로나가 미국에서 퍼지면 두 가지를 모두 놓치게 된다.

23일 현재 미국 내 신종 코로나 확진자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승객 18명을 포함해 35명이다. 인구수에 비하면 적은 편이어서 잘 통제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순식간에 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 백악관에선 연일 고위급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일부 관료들은 확진 사례가 너무 적은 데 의문을 제기하면서 은밀하게 퍼지고 있는데 정부가 모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하고 있다고 폴리티코가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21일 자에는 “미국 내 수십 또는 수백건의 감염 사례가 있는데 보고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전직 안보ㆍ보건 관료의 공동 기고문이 실렸다.

백악관은 또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서 경기가 하강하는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중국에서 대부분의 제품을 생산하는 애플과 월마트 등 미국 기업들은 이미 올 1분기 실적 부진을 예고하고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트럼프가 중국의 신종 코로나 대응을 비판하지 않는 것도 주식시장을 흔들지 않기 위해서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신종 코로나 언급을 삼가면서 공개적으로 '무시' 전략을 쓰고 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2014년 10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에볼라 확산 방지를 위해 핵심참모와 긴급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4년 에볼라 확산으로 미국 중간선거에서 당시 집권 민주당이 공화당에 상원을 내준 불편한 기억도 트럼프를 불안케 하는 요인이다. 에볼라에 감염된 미국 의료진을 국내로 데려와 치료하자 민심이 동요했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불만이 나왔다. 당시 공화당은 여행 금지를 주장하면서 여론에 편승했다. 에볼라가 미국인들에게 심각한 공중 보건 위기라는 잘못된 인식과 패닉이 퍼졌다. 오바마 행정부가 군인 3000명을 파병해 에볼라와 싸우겠다고 발표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상원은 공화당이 9석을 더해 54석이 되면서 여소야대를 이뤘다. 양당 통틀어 1980년 이후 가장 큰 승리였다. 하원에선 공화당이 13석을 더 가져가면서 1928년 이후 최다인 247석을 차지했다.

워싱턴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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