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수호가 진보 아니다" 진보기득권 비판하고 나선 사람들

정용인 기자 2020. 3. 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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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2월 10일 개설된 레드필 사이트/redpill.kr

“우리들 사이에서는 비유적으로 구(舊)마적·신(新)마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현재의 미래통합당이 구마적이라면, 현 집권세력의 상당수가 신마적 수준으로 타락한 것 아닌가.”

김수민 시사평론가의 말이다. 지난 2월 10일 개설된 레드필(redpill.kr) 사이트엔 그의 ‘평론’을 다수 접할 수 있다. 사이트에 올라온 다른 사람들의 글들도 보면 문재인 정부와 집권 민주당에 대한 비판이 매섭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한 홍세화 노동당 고문은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를 지지하는 글을 올리면서 “민주당에는 민주주의자가 없다”고 일갈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당으로서는 아픈 비판이다.

“조국 백서 맞설 ‘흑서’ 추진이 모임 계기”

외형상으로는 하나의 의견그룹 형성으로 볼 수 있다. 사회운동·학계·지식인 그룹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정부와 집권당에 대한 비판 흐름이 가시화된 것이다. 사이트 개설을 통해 외부로 드러났지만 흐름이 형성된 것은 지난해 가을께부터다. 서울 서초동에 모인 촛불이 ‘조국수호’를 주장하는 데 대해 “그 방향은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인 것이다. 김수민 평론가의 말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검찰개혁을 추진하다가 핍박을 당하고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국 백서> 발간을 추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농담조로 ‘그렇다면 우리는 <흑서>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다.” 원래는 2월 말쯤 관련한 토론회도 개최하려고 했지만, 최근 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취소했다. 아직까지 오프라인에서 공식행사를 개최할 계획은 없다.

모임은 소셜미디어(SNS)의 단체대화방을 유지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까지 참여자는 25명. 정치세력화나 이후 전망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레드필 사이트에는 공동의 선언문이나 입장문도 없다. 김씨는 원래 선언문 발표를 준비했지만 유예했다고 덧붙인다.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다 각자 다른 당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사회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새로운 기득권 형성에 비판적인 ‘사회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데까지는 동의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참여자들이 모두 동일한 의견은 아니다. 공통점은 일찍부터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반대해왔고, 서초동에서 주장된 검찰개혁 집회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칼럼 논란을 빚은 임미리 교수도 모임에 초대돼 함께하고 있다. 동양대 교수직을 그만둔 뒤, 논객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는 진중권 교수는 가담하지 않았다.

수십 년 전 NL·PD 논란의 제도권 내 재연?

모임 면면을 보면 전반적으로 과거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진보운동을 양분했던 NL·PD 진영 또는 자주·평등파에서 범PD, 평등파 출신이 다수다. 그러니까 오랜 NL·PD 대립구도가 30년의 세월이 흘러 제도권 안에서 재연되는 것일까.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한석호 전 민주노총사회연대 위원장은 “꼭 NL이 ‘조국수호’를 택하고, PD가 비판하는 그런 형태는 아니다”라며 “과거 NL 입장을 가졌던 사람들도 조국 전 장관 옹호와 비판으로 나뉘고 있고, PD 성향 중에서도 조국 전 장관이 취한 태도를 두고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한 전 위원장은 조국대전 국면 초기부터 일찌감치 ‘조국수호’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여기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을 정말 기원했던 사람들이다. 개인 생각이지만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의 가치와 기준이 있다. 민주당이나 정의당도 자신들이 진보를 앞에 내세운다면 공통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사회주의 내지는 혁명, 그런 감수성까진 아니더라도 ‘학력 사재기’는 안 된다는 데는 같은 생각인 줄 알았다. 주식이든 뭐든 투자도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최소한의 기준선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그게 뭔 문제냐’는 식의 옹호론이 나왔다. 제가 화가 나서 비판한 것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에게 ‘진보도 학력 사재기나 사모펀드 투자를 옹호하는구나’로 비치는 것이다. 저건 진보가 아니라 잘못된 진보이며, 진보에서 일탈한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역시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최병현 주권자전국회의 기획위원장은 “NL과 PD와 같은 과거 운동 입장이나 가치 차이를 떠나 한국사회의 합리성 기반이 취약하고, 합리적 이해나 고민·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라도 몇십 년 동안 현장을 떠나 있으면서 관념으로만 자신의 입장을 진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고민 없이 관성적인 과거 관념으로 현실을 재단하다보니 ‘조국수호’로 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경율 회계사(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 주도하고 있는 경제개혁단체 ‘경제민주주의21’의 활동도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 집행위원장은 ‘조국대전’ 국면에서 그동안 경제민주화 목소리를 높여왔던 참여연대가 조국 전 장관 가족 사모펀드 문제 등에 대해 침묵한다며 탈퇴했다. 김 회계사, 전 교수 이외에도 역시 참여연대에서 탈퇴한 조혜경 박사를 비롯해 8명이 현재 참여해 법인등록을 마쳤다. 사무실은 서울 합정동에 더부살이 형태로 마련했다. 김 회계사는 “사정상 따로 출범식은 열지 않을 계획이고, 사실상 단체 활동 시작은 홈페이지(www.viewsnshout.com)를 오픈한 2월 29일부터라고 보면 되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활동은 경제개혁시민단체라는 정체성에 맞게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때부터 해오던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사건, 이재용 삼성 부회장 승계를 둘러싼 파기환송심 사건에 대한 단체 목소리를 내는 것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김 회계사는 “조국 전 장관 관련 사모펀드와 관련해서는 현재 우리 팀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셈인데, 이슈는 계속 추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회계사도 앞서 레드필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시사평론가 김수민씨는 “사실 ‘조국수호’를 주장하는 분들도 조국이라는 개인이 좋아해서라기보다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 집권세력이 밀리게 된다는 위기의식에서 다들 이를 악물고 주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제일 우려되는 것은 한때 운동을 했다가 조금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진보가 이런 거냐’면서 실망감을 드러내며 멀어져가는 것”이라며 “‘조국수호가 곧 진보’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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