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事實'만을 붙들고 독자 여러분 곁을 지키겠습니다

양상훈 주필 2020. 3. 5. 03: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100년은 事實을 찾고 밝히는 데 성공하고 실패한 기록
그러다 박수받고 비난당한 기록의 모음
힘들고 외롭고 보상 없어도 事實 추구의 길 걷겠습니다
양상훈 주필

36년 전 조선일보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창간 100주년 날에 주필(主筆)이 돼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00년을 하루 앞둔 4일 아침 책상 앞에 앉으니 ‘내가 과연 이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만 보던 ‘역사의 무게’란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한다. 두려운 느낌이 든다.

일제강점기 안재홍 주필은 모두 9차례 7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다. 1942년 12월 그 추운 함경남도 감옥에 마지막으로 석 달여간 수감되고선 죽음 직전의 몰골이 되고 말았다. 감방 온도는 보통 영하 20도 정도였고 일제는 선생을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하게 했다. 같이 투옥된 두 사람은 감옥에서 죽었다. 최석채 주필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을 위한 언론윤리위법을 정면 거부했고 선우휘 주필은 한밤중에 윤전기를 세우고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비판했다.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당시 이들에게 어떤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기 어렵다. 오늘 아침, 그분들의 책상 앞에 앉으며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 100년을 맞는 날 논설 책임자로서 신문은, 언론은 무엇을 하는 곳이냐를 생각한다. 신문은 멋진 글을 쓰는 곳도 아니고, 군중을 모으는 격문을 쓰는 곳도 아니다.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는 소문을 쓰는 곳도 아니고 독자들이 반기고 좋아할 내용만 쓰는 곳도 아니다. 권력의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곳이 물론 아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인 곳도 아니다.

필자가 36년간 쫓아다닌 것, 지금도 조선일보 기자 수백 명이 매일 찾으러 다니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든 것,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닌 것, 왜 찾아다니느냐고 욕먹고 손가락질당하는 것, 그렇게 어렵게 찾았더니 생각과 전혀 다른 것, 찾아내 보니 권력을 분노케 하는 것, 어떤 집단이나 세력의 증오를 사는 것, 때로는 대중(大衆)의 요구와 다른 것,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하기까지 한 그것은 사실(事實·fact)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100년은 한 줄로 줄여 말하면 '사실을 찾다가 성공하고 실패한 기록'이다. 한 줄만 덧붙이자면 '그러다 박수받고 비난당한 기록'이다.

대부분의 '사실'은 숨겨져 있다. 몇 겹 껍질 아래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필자의 기자 생활 전부는 이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다. 성공도 있었다. 하지만 못 찾아낸 것, 잘못 찾은 것이 더 많다고 고백한다. 때로는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사실'도 있다. 누구나 보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권력의 위압 때문일 수도 있고 대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신문은 이때 말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신문으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사실로 위장한 것'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위장 사실, 가짜 사실은 인터넷을 타고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광우병 괴담, 천안함 괴담, 사드 전자파 괴담, 수돗물 괴담, 미네르바 괴담, 사진 영상 조작, 가짜 뉴스 등 위장 사실은 수많은 군중을 몰고 다닌다. 대부분 뒤에는 정치 세력이 있다. 언론이 괴담을 만들기도 하고 군중 규모가 커지면 다른 언론들이 편승하기도 한다.

여중생들이 "뇌에 구멍 뚫려 죽게 됐다"고 울던 광우병 사태는 지금 생각하면 희극 같지만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은 군중에게 폭행을 당하고 사옥은 오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사실을 찾고 말한 '죄'였다. 필자는 세 번 연속 광우병 소동은 과장돼 있다는 칼럼을 썼는데 살해 위협 문자를 받기도 했다. 매일 수만 수십만 군중과 이를 선동하는 정치에 맞서 사실을 말하는 것, 국민의 3분의 2가 믿는 일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기자라는 직업에 회의가 들 정도로 힘들었다.

보수 정권도 조선일보를 위협하고 조사했다. 정치 목적이 분명한 세무조사를 하고, 기자들을 해고하라고 하고, TV조선 재승인으로 협박하고, 다른 언론을 동원해 공격했다. 모두 사실을 찾으려 한 '죄'였다. 사람들은 실은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경우 '사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화나게도 한다. 자기에게 좋으면 '사실'이고 아니면 '거짓'이라고 한다. 대중이 솔깃해하는 '사실'은 허구인 경우가 더 많다.

정말 목말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시피 한 '사실'은 그러나 결국 사회와 국가와 역사를 움직인다. '사실'과 다른 길을 가는 나라가 맞을 결과는 명백하다. 지금 미국 쇠고기 안 먹는 사람 없고, 사드 전자파 두려워하는 사람 없고, 천안함 폭침 안 믿는 사람 거의 없다. '사실'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전투에서 패할 수는 있어도 전쟁에서 지는 법은 없다. 모두가 반기지 않아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이 '사실'을 찾는 일은 힘들지만 보상도 없다. 그래서 언론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사명(使命)이자 숙명(宿命)이다.

필자의 조선일보에 대한 소망은 ‘조선일보에 났으니 마음엔 안 들어도 사실은 사실일 것’이라고 독자들이 믿는 신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못 미칩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 1㎝씩이라도 나아가려 합니다. 창간 100년 아침에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입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