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자' 윤지오는 어쩌다 '적색 수배자'가 되었나

이재성 2020. 3. 6.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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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조정환, 장자연 사건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 혐오 현상 통해 '다중지성의 범죄화' 밝혀
"장자연 리스트는 있었다"..가부장적 성폭력 체제 유지·온존하는 '권력-언론 연합체' 비판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앞줄 가운데)씨는 책 출간뿐 아니라 방송과 인터뷰, 증인보호법 국민청원, 증언자·목격자·피해자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구성 등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한때나마 미투 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2019년 3월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1033개 여성단체 공동주최로 열린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고 장자연씨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 장면.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증언혐오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조정환 지음/갈무리·2만2000원

까판의 문법 살아남은 증언자를 매장하는 탈진실의 권력 기술 조정환 지음/갈무리·2만3000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는 현재 인터폴 수배 단계 중 가장 강력한 조처에 해당하는 적색 수배를 받고 있다. 뜨거운 환영 속에 입국해, 묻혀 있던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던 그는 어쩌다 사기꾼으로 전락했을까.

정치철학자 조정환이 동시에 펴낸 <증언 혐오>와 <까판의 문법>은 윤지오 편에 서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몇몇 소셜미디어 유명인사들의 주장에 기초해, ‘윤지오가 장자연과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본인 홍보를 위해 장자연을 이용했으며, 돈까지 걷다가 고발당할 위기에 처하자 황급히 캐나다로 돌아갔다’고 믿어온 사람이라면, 경천동지할 내용이 많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에서 사회적으로 매장된 ‘몫없는 이’, 윤지오를 위한 철학자의 변론인 셈이다. 실제로 지은이는 윤지오에 빗대어 드레퓌스 사건을 길게 소개하기도 한다. 두서가 없고 어법에 맞지 않던 윤지오의 일상 언어가 ‘조정환 번역기’를 통해 명징한 시민의 언어로 되살아나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요령부득의 진심이 비로소 얼굴을 드러낸다.

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여론이 윤지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김아무개 작가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 폭로였다. 윤지오의 증언 준비 과정을 도와주던 김 작가는 어느 순간 윤지오를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김 작가의 주장을 요약하면, 1.윤지오는 장자연에 관해 증언할 만큼 친하지 않았다, 2.윤지오는 장자연 문건을 본 적이 없다, 3.유가족이 반대하는데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책을 냈다, 4.숨어지냈다는 건 웃기는 얘기다 등이다.

1~2번 주장은 윤지오가 장자연 사건에 대해 잘 모르면서 중대한 증언자인 양 행세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윤지오가 생전의 장자연과 함께 많은 술접대를 강요당했으며, ‘장자연 문건’을 갖고 있던 매니저 유아무개가 윤지오에게 전화를 걸어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윤지오가 해당 이름의 명함을 갖고 있는지 확인했고, 나중에 봉은사 마당에서 문건을 불태울 때 윤지오가 참석한 사실 등을 거론하며 반박한다. 실제로 2009년 당시 경찰 관계자도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윤지오가 이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른바 ‘윤지오 비판자들’을 상대로 지은이가 벌이는 ‘팩트 싸움’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소개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은이는 김 작가가 카카오톡 대화 내용 편집 공개를 통해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윤지오의 ‘영리하게’라는 단어 역시 ‘영리하게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라,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여러 계획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윤지오의 증언 때문에 장자연 유가족이 손해배상 소송에서 졌다는 이른바 ‘배신자’ 프레임에 대해서도 장문에 걸쳐 반박한다. 후원금 사기 사건의 경우도 명확한 반박이 이뤄진다. 자발적 후원금은 기부금품 모집과 달라 법적 책임이 따르는 것이 아니며, 신한은행 계좌의 경우 후원금의 사적 사용은 없었고, 미국 크라우드 펀딩 ‘고펀드미’로 들어온 돈은 후원자들에게 모두 돌려줬다는 것이다.

증언자는 순수해야 한다는 강요

가족이 반대하는데도 책을 냈다는 주장에 대해 지은이는 김 작가가 가부장적 가족주의 관점으로 윤지오에게 침묵을 강요했으며,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증언자(피해자)를 비난하는 가해자중심주의 편에 섰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윤지오의 증언과 관련해 유가족들이 일체의 연락을 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윤지오가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을 냈다는 건 거짓 주장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또한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다고 하더라도,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사안에 대해, 불미스런 사실이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유가족의 관점을 받아들여 침묵하라는 주장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적 관점이며, 이런 가부장적 가족주의 역시 성폭력 체제를 유지·보존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이다.

가족주의는 순수주의로 이어진다. 피해자 또는 증언자는 순수해야 한다는 이른바 ‘피해자다움’에 대한 강요다. 지은이는 김 작가의 ‘숨어지냈다는 건 웃기는 얘기’라는 힐난이 각종 까판(‘까는 판’의 준말로, 주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특정인을 비난하는 문화)으로 스며들어 윤지오의 지난 10년간 삶을 검증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숨어 지냈다는 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데도, ‘까판’들은 이를 빌미로 사생활을 “훔쳐보고 조롱하며 짓밟”았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길게 반박한다. 오랜 수배 생활 동안 가명을 쓰며 경찰을 피해 도망을 다녔는데, 익명으로 글을 쓰고 활발히 활동했다는 이유로 도망 다닌 게 맞냐고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지오는 지난해 3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하기 전까지 익명으로만 인터뷰에 응했었다. 숨어 살았다는 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며, 문제가 된 사건과 관련해서 익명으로 살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문학이 정치나 참여를 주장하지 말고 자연을 노래하는 순수성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전두환 군부는 계엄군의 학살 행위에 맞서 방어 무기를 든 광주 시민들을 순수하지 못한 폭도라고 불렀다. 순수주의는 권력과 돈은 다 내가 갖겠으니 너희는 무(기)력과 가난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며 압제와 착취에 이용되는 정신적 장치다.”

“장자연 리스트는 있었다”

윤지오 비판자들과 조정환의 ‘팩트 싸움’ 가운데 백미는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 여부에 관한 것이다. 조정환의 결론은, 방송에 보도된 A4용지 4장짜리 ‘장자연 문건’(그는 이 문건을 유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증언조서’라고 부른다)과 별도로 ‘이름들이 나열된’ 리스트 형태의 3장짜리 문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매니저 유아무개씨와 장자연의 오빠는 초기 진술에서 이 리스트의 존재를 인정했다가, 이후 서서히 말을 바꿨지만, 윤지오만은 이 리스트에 대해 2010년 6월 이래 일관된 진술을 유지하고 있다.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 아래 무슨 사의 누구라는 식으로 기재돼 있었다는 것이다.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한 기자에 대해서는 ‘2009년 최초 진술에서 문건의 일부(한 문장)만을 봤을 뿐 전체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며, 이제 와서 전체를 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반박이 이어진다.

그런데 더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대목은 “성상납을 강요받았다”는 주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 또는 의도적 무시다. 당시 경찰과 검찰 모두 이 진술을 완벽히 무시했을 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 들어 이 사건의 재조사를 시작한 검찰 과거사위원회와 과거사진상조사단도 이 부분을 더 파고들지 않았고, 결국 수사 의뢰 포기로 이어졌다고 지은이는 개탄한다. 성상납 강요라는 말은 성폭행과 동의어이며, 그렇다면 저 리스트는 성폭행 리스트라는 말이 되는데, 문재인 정부의 검찰 과거사위조차 “윤지오의 증언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방식”으로 리스트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구하면서도 특검이 아닌 기존 검찰 조직에 사건 해결을 맡겼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결국 증언자(피해자)는 사기로 후원금(고펀드미)을 모금한 혐의로 인터폴에 쫓기는 신세가 됐고,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익명의 특권을 누리며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

철학자가 윤지오에 꽂힌 이유

철학자 조정환은 ‘다중지성’을 연구하며 ‘예술인간’으로 주제를 확장하다가 윤지오를 발견했다고 한다. 마침 지난해 5월 열릴 예정이었던 좌파 학술대회인 ‘맑스코뮤날레’에서 예술인간을 주제로 발표하려고 준비하던 중,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게 됐고, 이내 좌시할 수 없게 됐다. 그는 윤지오 혐오 현상을 ‘다중지성의 범죄화’라고 명명했다.

“일개 시민, 그것도 증언자를 향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증언자를 난도질하고 있는 사태는 실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며 대한민국 사회에서 엄청난 광기가 폭발하고 있다고밖에는 달리 묘사할 언어를 찾기가 어렵다.” (<까판>) “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지금 양두구육의 위선자-국민, 사기꾼-국민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지오에게 진실로 부끄럽고 죄스러우며 대한민국을 위선자의 나라, 사기꾼의 나라로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증언혐오>)

두 책의 핵심 목표는 크게 세 가지다.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기꾼이라는 누명 벗기기(윤지오에게 사기꾼이라는 누명을 씌운 세력에 대한 비판), 그리고 가해자중심주의 시각으로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를 유지·온존하고 있는 한국 사회(권력-언론 연합체) 비판, 마지막으로 특검을 통한 장자연 사건의 재수사 촉구다. 자못 도발적으로 읽히는 지은이의 문자 투쟁이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처럼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책을 읽는 독자의 몫에 달려 있지 않을까.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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