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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종족주의> 쓴 황태연 교수 "역사학자들, 너무 공부 안한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 선임기자 입력 2020.03.07. 09:48 수정 2020.03.0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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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2월 27일 <일제종족주의> 대표 집필자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서울대 교수 출신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연구소 필진이 쓴 <반일종족주의>가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됐다. 통계수치와 나름 그럴듯한 증거를 동원한 이 주장에 독자들이 현혹된 것이다. 이에 맞선 <일제종족주의>라는 책이 나왔다. 필자는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를 비아냥거리려 단 책 제목”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매우 격렬한 표현으로 친일학자를 공박하고, 통계수치와 해외 사료까지 폭넓게 인용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대표 집필자 황태연 동국대 교수(65)를 만났다.

-이영훈 등 친일학자를 비롯한 친일파를 ‘부왜노(附倭奴)’, 즉 ‘왜에 빌붙은 노예’라고 표현했다. 너무 과격한 표현 아닌가.

“오래전부터 목포·여수 등에 정착해 산 왜구를 ‘토왜’라 했고, 나중에 친일파를 토왜라 불렀다. 단재 신채호는 외국에 붙어 외국문화를 칭송하며 우리를 깔보는 자를 ‘부외노(附外奴)’라고 표현했다. 우리말사전에 ‘부왜(附倭)’는 ‘왜국에 붙어서 나라를 해롭게 하는 사람’, ‘부왜역적’도 사전에 나오는 말로 과격한 표현이 아니다.”

-그 ‘부왜’를 하는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연구소 인사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과도해 보인다.

“(허허)그들을 반국가단체로 잡아넣지 않는 검사X이 나쁜X이다. 반국가단체란 반헌법적단체다. 우리 헌법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는 반일독립국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친일은 곧 반헌법적이고 반국가행위다.”

<반일종족주의>에 맞선 <일제종족주의>

인터뷰 초반부터 매우 논쟁적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교역하는 것 역시 반헌법적이고 반국가적이란 말인가. 현직 대학교수 주장치고 비약이 크고 극단적이다. 마치 <반일종족주의>에 나오는 이영훈의 주장과 180도 차이만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북한만이 반국가단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면서 “역사적으로 북풍(대륙세력)은 한 번도 우리 민족을 말살한 적이 없지만 남풍(해양세력·일본)이 우리를 멸망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수·당은 우리를 침략하다 망했고, 원은 고려와 37년 항쟁을 벌이다 왕조·영토·전통을 그대로 두는 조건으로 항복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원·청이 중국 한족에게 머리를 깎는 변발을 시켰지만 고려·조선인은 그대로 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국권을 빼앗고, 단발령으로 머리까지 깎았다고 말했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이라는 책에서 갑오경장을 ‘갑오왜란’으로 을미사변을 ‘을미왜변’으로, 1904년 무단 군사 침략을 ‘갑진왜란’ 등으로 표현했다.

“그 사건을 왜란으로 보지 않는 것 자체가 친일이다. ‘경장’은 왜란을 감추려고 지어낸 말이다. 갑오경장은 통화를 바꿔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고 친일 괴뢰군대를 만드는 등 우리 조선 입장에서 반동적 행위다. 그게 어떻게 경장인가. 일본이 경장이니 사변이니 표현했던 것을 정신 나간 역사학자들이 해방 후에도 그냥 쓰는 것이다. 아관파천도 친일신문 <한성신문>만 파천이라 썼고, 당시 모두 ‘아관망명’이라 썼다. 파천이란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의미인데 고종이 한성에 있었는데 왜 파천인가. 일부 국사학계와 서울시도 아관파천길을 아관망명길로 바꿨다.”

-책을 보면 대한제국을 너무 미화하고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국뽕’적 시각 아닐까.

“일본 기준에 의하면 과대평가지만 정당한 평가다. 일본이 놓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한강철교(1897년 착공, 1900년 준공)와 경의선 모두 고종이 놓은 것이다. 전철도 일본 도쿄보다 2년 먼저 부설했고, 전화는 일본과 같은 시기(1902년)에 가설했다. 나는 고종을 영조보다 뛰어난 군주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에서 신식군대 3만 명을 보유한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고 대한제국밖에 없었다. 국제법적 처음으로 독도를 우리 땅이라 선언한 사람도 고종이다.”

-그럼 고종 독살설을 믿는 것인가.

“당연하다. 고종은 북경으로 망명하려 했고, 헤이그에 이어 베르사유에 왕자 이강과 미국에서 공부한 최초의 여학사 ‘김란사’를 밀사로 또 보냈다. 그런데 이강은 안동에서 잡히고 하란사는 북경에서 독감에 걸려 죽는 바람에 실패한다. 이것은 지금 역사학계에서도 확인한 사항이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이를 일련의 통사로 연결하지 못한다. 내가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에 자세한 사료를 기반으로 통사를 썼다.”

구한말 역사 상식에 반하는 주장

-한국 기록, 이를테면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고종의 무능과 민비 일가의 부패, 이에 따른 기아와 수탈이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매천(황현)이 친일 박영효파로 <매천야록>은 아무 근거 없이 고종을 비난한다. 민비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는데, 그것은 당시 모든 왕비가 하던 행사다. 매천도 <매천야록>에 민비의 영민함을 많이 언급했다. 그런 부문은 안 보고 부정적 부문만 과장되게 알려졌다. <운현궁의 봄>을 쓴 정비석 등 친일작가들이 고종과 민비상을 어그러뜨렸다.”

그는 일반이 알고 있는 구한말 역사 상식을 정면으로 깬다. 그는 근거로 다양한 사료와 수치를 증거로 들고 있다. 그는 1901년 독일 <쾰른신문> 기자로 한국을 방문한 지그프리트 켄터의 연재물을 제시했다. 신문은 “북경도·동경도·상해도 서울처럼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가진 것을 자랑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1886년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초빙된 헐버트가 1906년 다시 한국을 방문한 쓴 <한국의 독립투쟁>이라는 책에 “서울은 전등·전차·영화관이 있었다… 상류계급의 많은 한국인이 미국 대학에서 졸업장을 받고 귀국하고 있었다. 경찰은 신식복장을 갖추고 신식으로 훈련되고 있었고, 적지만 근대적인 군대가 출범했다”는 대목을 제시했다.

황 교수도 수치를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경제통계 책임자로 오래 근무했던 앵거스 매디슨이 산출한 한·중·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다. 매디슨은 1911년 조선경제는 일본 경제학자 미조구치 도시유키가 추계한 ‘1911~1938년 1인당 국민생산 추계’를 활용, 1990년 국제평균 달러로 환산했다. 이에 따르면 1911년 조선의 1인당 국민소득은 815달러로 아시아 4위이고, 1915년에는 필리핀·인도를 제치고 일본에 이어 2위가 된다.

황 교수는 “고종이 직접 통치했던 1897년부터 1903년까지는 경제적으로 최악이 아닌 고도성장기였다”면서 “낙성대연구소에서 이 통계를 수정했는데 고종재임 기간 경제성장률은 오히려 6% 높아졌다”고 주장했다. 구한말 경제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이론적 근거다. 최악의 경제 빈곤으로 조선이 망했고, 식민지화한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근거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교수의 이런 주장은 식민지근대화론자 근거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황 교수는 “역사학자들은 조선총독부 촉탁 이병도 논문만 보거나 기껏해야 일본 측 자료만 본다”면서 “나는 영어·독일어·러시아어 사료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우리 역사학자들은 통계나 숫자에 약해 이영훈 같은 경제학자들이 내미는 엉터리 통계를 반박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경제학 공부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1955년 동학혁명 본거지인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전주고를 나와 74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당시 법대 유명 이념서클인 농법학회에서 활동했지만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 대학 3학년 제11회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외교관보다 학문을 선택했다. 대학원(서울대)에서 헤겔로 석사학위를 받고, 8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으로 유학했다. 그는 “당시 운동권에는 공산주의 이론만 난무하는 전환기 상황이었다”면서 “사회운동의 근본적 이론으로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배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황태연 교수가 2018년 한 역사문화강좌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DJ에게 ‘DJP연대’ 제안

우리가 잘 아는 유시민·진중권 등이 독일에 유학했지만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독일은 절대 학위를 대충 주지 않는다. 게다가 유학생 대부분 한국 정치 상황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실정에서 독일철학의 ‘종합판’격인 마르크스로 학위를 받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는 “매주 소논문을 제출하고 평가를 받아야 박사논문을 쓸 자격을 준다”면서 “마르크스의 지배와 노동’을 주제로 7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학부·석사·박사를 모두 마칠 기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4년 동국대에 정치사상 교수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92년 대선에 실패해 영국 체류에서 돌아온 당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김종필의 충청지역과 연합이라는 소위 ‘DJP연대’를 제안했다. 황 교수는 “원래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적용된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이라며 “‘어떻게 유신잔당과 손을 잡나’라고 망설이던 DJ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결국 DJP연대는 성사되고 그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막후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이 주장은 1997년 <지역패권의 나라>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정책자문위원을 맡았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DJ정부 막후 실세’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답방 문제가 거론됐다. 그는 한 국회의원 연구모임에서 “6·25전쟁과 KAL기 테러 등은 사과가 아닌 국제법적 사안”이라는 발언으로 보수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됐다. 그는 보수 언론의 종북몰이에 소송까지 벌이며 싸웠지만 결국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기성 정치권에서 돌아온 그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갑진왜란> <국민전쟁>·<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등 한국 근대사 연구에 매달렸다. 그는 “역사는 당시대 국민이 공감하는 ‘공감적 해석학’이 옳다”면서 “갑오왜란(경장) 이후 김홍집 내각에 당시 국민은 ‘왜당정부’라 불렀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부르주아나 계급사관이 아닌 보통 국민사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에게 두 가지 민족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일제 침략·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로 지금까지 자신이 친일파와 식민지근대화론자를 혹독히 비판하는 이유다. 다른 하나는 통일을 향한 통일민족주의다. 그는 “통일에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면 정복하자는 논리로 남북적대의 불씨가 된다”면서 “민족이 하나라는 감정적 동력인 통일민족주의는 분단이 계속되는 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통일을 남북이 공감하는 평화통일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지금 헌법 정신이고, 대통령의 의무라는 것이다.

황 교수는 요즘 ‘공자철학’에 매료됐다.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 기원>·<공자의 인식론과 역학> 등 17~18세기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계몽주의 기원이 공자사상에 있음을 규명하고 있다. 2년 전부터 유튜브 ‘황태연 아카데미아’를 통해 이런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실용적 중도정치가 DJ 민주당 정치의 맥’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이는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 정치노선과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내 이론을 안 대표가 좋아하는 것이지 DJ처럼 정치적 연결은 없다”고 밝혔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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